해마다 방학만 되면 내겐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2008년부터 일반대학교에서 기독교교과목을 가르쳐오면서 1년에 두 번은 생기게 된 현상이다. 그건 다름 아닌 학생들의 강의평가다. 교수에 대한 강의평가를 먼저 해야만 그들의 성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그들의 무기명 평가는 언제나 나를 ‘음매 기죽어’ 시킨다.
이번에도 그랬다. “너무 어렵다. 교수 방법 좀 바꿔라. 왜 이런 과목을 공부해야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기독교만 너무 주입시킨다….” 등등. 그들의 평가는 혹독하고도 거침없었다. 정말 이런 평가를 안받아본 사람은 그 더러운 기분을 모른다. 물론 이런 평가가 열의 하나이긴 하지만, 어찌 아홉의 칭찬만으로 기분 좋아라 할 사람이 있으랴.
물론 억울한 것이 왜 없으리. 그렇게 평가한 학생들 이름 좀 알고픈 마음은 왜 또 없으리. 난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도움 될 만한 각종 영상 자료에, 재밌어 할 만한 최신 지식에, 스타일도 교회와는 전혀 다른 변신을 시도하며 정성을 다했는데, 이토록 몰라주는 그 아이들이 어찌 섭섭하거나 야속하지 않으리.
그런데 난 요즘 그것이 너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감사거리가 되고 있다. 그것이 성도들의 평가도 아닌 학생들 평가이고, 교수의 일이 나의 주(主)사역이 아닌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그보다 그 평가가 정말 고마운 이유는 그들이 날 또 한 번 겸손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날 다시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목회자는 너무 한곳에서, 한쪽 사람들 이야기만 자주 듣지 않는가? 그러다보니 목회자는 나도 모르게 ‘칭찬병’에 젖을 수 있다.
사실 교회 안엔 그런 평가장치가 없다. 절차도, 기준도, 당위성도, 문화도 없다. 교회 안에서 설교와 목회에 대해 대놓고 평가 받을 일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설교만 하면 무조건 성도들은 ‘아멘’이다. 어떤 이는 눈물도 훔친다. 예배 후 나갈 땐 손 한 번 잡아주고, 눈 한 번 맞춰주기를 기대한다. 많은 이들의 “은혜 받았다”는 고백만 넘친다. 사실 성도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목양하는 이를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으리.
그건 좋은데, 그러다보니 어느덧 목회자는 조그만 싫은 소리에도 귀를 닫게 되는 것 같다. 혹독한 평가는 도무지 견디지 못한다. 목회의 스산한 가을과 냉혹한 겨울이 오면 확실히 적응력이 떨어진다. 늘 활기찬 봄과 뜨거운 여름과 풍성한 가을만 좋아라 한다.
그러면 안된다. 자꾸만 그러면 날 보는 눈만 더 흐려진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점검하는 자다. 이 점검은 혹독한 평가를 들을 때만 제대로 된다. 그러지 않으면 좀처럼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버릇없는 얘기도 이따금은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날 좋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으려 해선 안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평가가 모두 필요하다. 그런 끊임없는 자기반성만이 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만들 수 있다.
몇 년 전 라디오방송에서 들은 얘기다. 한 대학 교수의 은퇴인터뷰였는데, 은퇴기념논집을 후배 교수들이 만들어줬단다. 그런데 그 글들을 읽어보니 자신의 관심과 사상과 이론을 잘못 이해하고 쓴 글들이 몇 보였단다. 그래서 “이건 내 입장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그 논집을 그대로 내게 했단다. 그러면서 그가 느낀 것은 “남이 보는 나도 나로구나”하는 점이었단다.
역시 존경할만한 교수님이라는 생각을 방송을 들으며 해보았다.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 의해 인정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에 의해 평가된 자신의 부족도 인정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목회자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서도, 성도 앞에서도 끊임없이 부족함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그걸 알면 무조건 감사할 것밖에 없을 것이다.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