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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계시로서의 성경

쉽게 쓴 조직신학이야기 - 5
조동선 교수 한국침신대(조직신학)

그루뎀(Wayne Grudem)은 세 가지 유익을 언급한다. 첫째, 글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비언어적 방식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보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통해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신31:11~13; 수 1:8).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반복된 연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이해와 더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요 5:39; 딤후 2:15 참조).


셋째, 기록된 책으로서의 성경은 꿈이나 환상 혹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구전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이후에도 특별 계시가 추가적으로 주어지고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 특별 계시의 핵심 내용은 구속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와 구속받은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최종 계획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뤄진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연합에 대한 최종 계시의 책인 요한계시록이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신약 27권 이외에 추가돼야 할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중단됐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란 가운데 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중간기 유대교 문헌은 말라기서 이후 침례 요한의 등장까지 약 400년 동안 구약의 선지자 활동이 중단됐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마카비 1서(1 Maccabees)는 중간기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다고 주장한다(4:46; 9:27; 14:41). 1세기 유대교 제사장이었으나 예루살렘 성전이 몰락 이후 로마 제국에서 역사가 된 요셉푸스(Josephus) 또한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이후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했다(Apion, 1.8, 37-42. 그 외 구약 예언의 중단에 대한 다른 중간기 문헌의 증언으로는 Babylonian Talmud, Yomah 9b; 1 QS 9.11; 2 Baruck 85.3; Prayer of Azariah 15를 참조하라). 구약 정경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구약 성도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예언을 담고 있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소개하는 침례 요한의 등장까지 구약 39권은 당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분한 계시였고 신앙의 문제에서 최고의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은 신약에 대한 예언이며 성취는 아니기 때문에 신약 교회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실제적 성취와 이것에 대한 계시를 보존하는 새로운 추가적 정경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정경 책이자 예언의 책인 요한 계시록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최종적 완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완성된 신약 정경에서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것이 금지됐다(계 22:18~19).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추가적인 정경적 계시의 의미로서의 특별 계시를 기대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든 이미 완성된 정경의 신학에 반대되는 견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설교와 성경 연구와 영적 체험들은 완성된 정경을 통해 전해진 완전한 특별 계시의 내용에 의해 성경적인 것으로 입증돼야 한다.


물론 구약과 신약에 선지자들이 성경을 기록한 예언 활동만 한 것은 아니며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선지자들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구약에는 우리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선지자들이 있었고(왕하 2:3,7,15; 4:1,38; 5:22; 6;1)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한 선지자들도 있지만 성경 형성과는 무관하게 교회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며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선지자들도 있었다(고전 14:3). 따라서 정경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그분의 백성에게 알리시는 성령의 역사는 지속적인 것이다. 비록 성령께서 새로운 정경을 형성하시기 위해 특별 계시를 주시지는 않지만 그분은 이미 기록된 성경의 의미를 더 정확히 알려주시기 위한 조명(illustration)의 사역을 하신다(고전 2:11~14).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특정한 삶의 문제에서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인지에 대하여 설교나 성경 연구와 같은 객관적인 계시의 자료인 성경이라는 통로를 통해 알려 주신다. 이런 방식과 함께 성령은 동시에 성도의 영 안에서 주관적인 방식으로, 즉 내적이며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도 인도하신다(갈 5:26). 물론 성령의 이 직접적 인도하심은 이미 기록된 계시의 책인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 없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요 14:17) 자신이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성경(딤후 3:16; 벧후 1:20~21)과 어긋나게 스스로 모순된 방식으로 성도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8; 벧전 1:11)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사람들에게 확증해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분이며(요 14:26; 15:26; 16:13),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다(요 16:14).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는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는 식으로는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말씀 중심적이다.


그러나 성령의 내적이며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령께서 새로운 정경의 내용을 위해 추가적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현재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지식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계시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적용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와 성경 교사들의 가르침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지만 사도들과 같은 권위와 성령의 영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 늘 복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만 성경과 독립된 권위 혹은 성경에 추가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설교자와 성경 교사가 늘 오류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실제로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의 부족함으로 오류를 범한다면, 성령의 주관적 인도하심을 주장하는 은사자들이나 리더들 역시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로부터 어떤 지혜와 지식을 받았다고 느껴진다 해도 웨인 그루뎀이 조언했듯, “성령이 이르시길,” 혹은 “내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한다”라고 하지 말고 “내가 느끼기에” 혹은 “나에게 이런 영적 부담감이 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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