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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

쉽게 쓴 조직신학이야기 - 6
조동선 교수
한국침신대(조직신학)

“신앙의 문제에서 최종적인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 개혁가들로 하여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독일 귀족들에게 고하는 글에서 신학적, 도덕적 오류를 범하는 교황보다는 근본이 비천한 자라도 성경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의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라의 말 대로 해야 했고(창 21:12), 발람은 사람도 아닌 당나귀의 말을 들어야 했다(민 22:32~33). 신앙의 최종 권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성경’과 ‘하나님’을 동의어로 사용해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신 창세기 2:24의 말씀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마 19:4~5). 바울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출애굽기 33:19의 성경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롬 9:15).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말하셨는데 바울은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약속한 것이라고 설명한다(갈 3:8). 예수님과 바울에게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다.


예수님은 진리의 기준으로 언제나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셨다. 광야에서 시험당하실 때, 예수님은 모세오경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다.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성경의 최종 권위를 사용하셨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출애굽기 3:6을 읽어 보았는지 물으시며,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부활을 부인한다고 하셨다(마 22:29, 32). 어떤 율법교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영생 얻는 것에 관하여)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그가 그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해석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다(눅 10:26).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이슈들에 관해서도 예수님은 성경의 최종 권위에 호소하셨다. 앞서 언급된 이혼의 문제에 대해, 창세기 2:24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에 구약에 기록된 부모 공경에 대한 명령과 부모에 대한 모욕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르반’이라는 제도로 부모 섬기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고 책망하셨다(막 7:1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의 책이다(막 7:7~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다. 성경에 위배되는 인간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마 15:6, 9). 성경이 결코 폐할 수 없는(막 7:13; 요 10:35) 이유는 성경이 전달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그것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권위가 부인되거나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부정하던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과 그분의 대적자들은 성경의 해석에 대해 논쟁했으나 성경의 신성불가침한 권위는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공동의 전제였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주장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돌로 치려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편 82:6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자신 이외의 존재, 즉 자신의 말씀을 받은 인간을(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의 재판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면 하나님과 본질에서 하나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인 자신에게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부절적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셨다(요 10:36). 예수님이 구약의 성경 구절을 인용해 자신의 신성을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대적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실을 모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믿었던 이유는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했기 때문이었다(요 7:42). 예수님이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으니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자 그의 대적자들은 더 이상 그분과 논쟁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시편 110:1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신학적,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만 성경을 의지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과 구속 사역이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면서 자신이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라고 성육신의 목적을 밝히셨다. 광야에서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후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주의 성령이 임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는 메시야임을 지적하셨다(눅 4:17~19).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잘라 버리자 예수님은 자신이 성부께 간구해 열두 군단보다 더 많은 천사를 보내달라고 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하셨다(마 26:54). 예수님이 강도처럼 잡혀가게 된 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성경(the Scriptures of the prophets, ESV)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26:56).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역시 구약 성경의 성취였다(눅 24:44~45; 고전 15:4; 벧전 1:10~12).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그분의 관점과 태도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성경을 단순히 설교에 대한 영적, 신학적 통찰력을 주는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참되고 유일하신 창조주, 구원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자질과 권위는 유대 탈무드나 동서양 현자들의 묵상집의 그것들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질문들은 최종적으로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성경의 명확한 진술이든, 간접적인 신학적 암시이든, 종합적인 논리적 결론에 의한 것이든 우리 개인과 교회와 교단이 내리는 결정과 실행들은 언제나 성경에 부합해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며, 주여! 주여!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개혁의 신학적 유산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오직 성경’를 제시한다. ‘오직 성경만’의 원리는 성경만 가지고 있어야 하고 성경만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무오한 최고의 절대 권위는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떤 인간의  권위에도 판단을 받지 않는 일차적이며 절대적인 판단 기준 그 차제로서 ‘모든 규범을 다스리는 유일한 규범’이다. 그리고 신학 전통, 교단의 전통, 신학자의 견해는 성경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이차적이며 상대적인 규범이다. 신조와 신학과 설교가 완전한 계시인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성경의 내용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한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권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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