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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과 항일활동과의 관계

김용국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

이종덕이 중심이 되어 ‘포교계’ 제출을 거부한 것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으나, 반일 민족주의적 측면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포교계’ 제출 거부는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일제에 의해 ‘포교계’ 제출이 강제되던 당시 상황에서는 항일활동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고난을 감수하면서 일제의 주요 정책을 거부한 것은 일제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행위이고, 그것은 강제 병합된 상황에서 항일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기독교회 교인들은 ‘포교계’ 제출 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박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단행한 것은 일제의 부당한 통치에 항거하는 활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30년대 신사참배 반대와 박해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보다 더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신사참배는 충성스러운 일본 국민 양성의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일본은 근대 천황제 실시 이후 국가주의 교육을 채택해, 학교 교육을 천황제를 뒷받침하는 주축으로 삼았다. 일본 학교들은 천황은 일본의 최고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이며, 신사참배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행위라고 가르쳤다. 이를 위해 신도(神道)를 신사신도(神社神道)와 교파신도(敎派神道)로 구분해, 전자는 종교가 아닌 국민의례이고 후자는 종교라 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신사신도는 내무성 신사국이 관할하고, 교파신도는 문무성 종교국이 관할하게 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조선 총독부 초대 학무과장 쓰미모토는 1910년 9월 8일자 “교화 의견서”에서, 조선 민족의 일본화를 이룩하려면 일본의 언어, 풍속, 습관의 체득과 경제적 번영만으로는 안 되며, 충군애국 정신을 심어줄 때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즉 천황을 숭배하는 정신이 없으면 내선일체는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법학자 호즈미 야쓰카 역시 조선에서의 교육은 “황실을 숭경하는 정신을 부식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천황과 국가 영웅들을 숭배하는 국민의례이므로 학교에서 가르쳐야 되지만, 종교 행위는 정교분리에 위배되므로 학교에서 실행하면 안 된다고 했다. 조선총독부 초대 학무국장 세키야는 교육과 종교의 분리는 신교의 자유와 교육 발전에 필수라고 했고, 외사국장 고마쓰 역시 국민 교육을 종교와 분리시키지 않으면 신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3월 24일에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고,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조선총독부 시학관 다카하시는 1927년에 전국 각 도지사에게 보낸 “신사참배와 학교교육”에 관한 통첩에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닌 국민교육의 요체임을 재차 강조했다. 이처럼 일본은 학생 시절부터 신사참배를 통해 내선일체 사상을 심으려 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신사참배는 보다 강요됐다. 한국의 기독교계 학교들도 신사참배와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이에 불응한 학교들은 1937년부터 1939년 사이에 폐교되거나 관공립학교에 흡수됐다. 신사참배 수용과 관련해 장로교 선교사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평양 숭실학교 교장 조지 맥큔(George S. McCune)은 1935년 12월 13일 야스타케 평남지사에게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양심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경배한다고 해석될지도 모르는 행위인 신사참배를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대구의 계성학교 교장 해럴드 헨더슨(Harold H. Henderson)은 만일 신사참배가 단지 국가에 충성을 표시하는 행위라면 신사에 절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해, 1936년 선교사 연회에서 69대 16으로 교육사업의 철수를 결의했다.


대한기독교회의 후신인 동아기독대는 다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처럼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봤다. 김영관 감목의 명의로 전국 교회에 배달된 1935년 10월 5일자 ‘달편지’에는 이러한 교단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어떤 구역에는 관청 당국에서 황제에게 요배를 하라고 시켰사오나 그것에 대하여 결코 응할 수 없는 것은 가령 황제님 앞에서 절한다는 것은 옳지만, 멀리서 보이지 않는 데서 절하는 것은 헛된 절이며, 곧 절반은 우상의 의미를 가졌으니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고 황제께 불경한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이 복음을 어기고 황제께 공경한다면 진정한 복음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복음을 어기고 자기를 공경하라고 명하실 황제님이라고 저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불경죄라고 책임을 지운다면 그 은혜 베푸시는 대로 핑계 없이 감당하기를 원하며 ….


교단은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는 우상숭배로서, 성경과 복음주의 신앙에 위배되기 때문에 결코 실행하면 안 되고, 만일 그로 인해 박해를 피할 수 없다면 감수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신사참배는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위의 ‘달편지’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김영관 감목, 백남조 총부서기, 이종덕 안사, 전치규 안사, 노재천 목사 등 5인을 원산경찰서에 구금했다. 이들은 3개월간 원산경찰서에 구금되고, 5개월 동안 원산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재판 결과 김영관과 백남조는 3년 집행유예, 나머지 세 사람은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당시 펜윅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이라 박해를 면할 수 있었다. 펜윅은 1935년 12월 6일, 72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가운데 친일로 돌아서는 사람의 수가 급증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사무관인 모리의 보고에 의하면, 1938년 5월 말 현재 한국 기독교도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 93%, 동방요배는 94%, 신사참배는 53%의 참가율을 기록했다. 조선신궁의 참배자 연인원은 1931년 403,550명, 1937년 2,022,292명, 1940년 2,158, 861명, 1942년 2,648,365명이었는데, 1937년에 그 수가 급증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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