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기독대에서도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938년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의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이 있다.
함북 경흥군 경흥면 동아기독교대 통장(統長) 박석홍은 작년(1937) 11월 6일 관할서에 출두해 ‘우리들은 일본제국 신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감은 없지만, 좌담회 등에 의하여 황군이 우리들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제국신민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기도를 계속하게 된 것을 깨달아 예하 신자 일동으로부터 국방헌금을 갹출했다.
이 보고서는 일제가 중일전쟁 전후 시기 동아기독대를 관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그동안 동아기독대를 조선 기독교단의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함시켜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사무관 모리는 동아기독교회를 2263명의 교세를 가진 조선인 포교의 교파 중 가장 큰 교단으로 보고했다. 총독부가 동아기독대를 관리하는 상황은 박석홍과 경흥교회에 큰 압박이 됐을 것이다.
경흥교회처럼 동아기독대 교회들 가운데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교회들이 늘어갔고, 교단에서 신사참배 찬반논란은 갈수록 격화됐다. 이에 곤란을 느낀 김영관 목사는 결국 감목직을 사임했는데, 이는 동아기독대 내에 신사참배 찬성파의 수가 결코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결국 제2대 감목이었던 이종덕 목사가 임시의장을 맡아 1939년에 제34차 대화회를 원산에서 진행했는데, 본 대화회에서는 “숨님(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대로 따른다”라는 신앙으로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끝까지 반대하기로 결의했다. 교단의 결정은 일제의 혹독한 박해를 불러왔는데, 심지어 교단에서 감목직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려운 와중에 이종근 목사가 1940년에 감목직을 맡겠다고 자원해 겨우 교단의 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됐다. 이종근은 철석같은 의지로 복음주의 신앙을 지킨다는 교단의 결의를 준행했다. 동아기독대는 일차적으로 신사참배가 복음주의 신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거부했으나, 그것은 항일활동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신사참배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국가주의의 요체였으며, 내선일체 실현을 위한 핵심 정책이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거부는 국체를 부정하고 내선일체를 방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 대상이 됐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동아기독대가 치열한 논의 끝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것은 의도적인 항일활동으로 볼 수 있다.
1940년대 재림신앙과 교단폐쇄
동아기독대의 후신인 동아기독교는 신사참배 거부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 또한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성경적 진리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1940년부터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반국가적 사상으로 간주해 관련자들을 검속 체포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보안과는 1940년 9월에 19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는 보고문을 발표했다.
일본은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국체의 변혁을 획책하는 악질적인 범죄로 봤으며, 동아기독교는 바로 이 신앙으로 인해 폐쇄됐다.
소위 ‘원산사건’으로 불리는 교단폐쇄 사건은 우태호와 관련해 발생했다. 우태호는 평안남도 장로교 목사 우기모의 아들로 1903년 2월 19일에 출생했다. 그는 1920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1930년 캘리포니아 파사데나대학교(Pasadena University)를 졸업하고, 1932년 8월 20일 애틀랜타의 오글레돌프대학교(Oglethorpe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7년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의 신학부에 입학했다. 밴더빌트 학생 시절 침례교로 전향해,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벨몬트하이츠침례교회(Belmont Heights Baptist Church)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교회에서 설교 자격증을 취득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우태호는 1940년 5월 20일 캔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서든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벨몬트하이츠침례교회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아 미남침례회 일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우태호는 1941년 9월에 원산의 동아기독교 총부에 와서 자신을 소개하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교단 지도자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우태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동아기독교에 합류하려 했고, 펜윅의 양아들인 안대벽은 그가 교단의 재산을 노려 합류하려는 것으로 의심하고 일본 형사에게 우태호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태호는 격분해 일본 헌병대에 동아기독교를 불순한 단체로 고발하고, 당시 성서공회 총무였던 오문환에게 동아기독교의 ‘복음찬미’와 ‘신약전서’를 건네줬다. 오문환은 내선일체를 위한 목회자 모임을 이끈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였다. 그는 20명으로 구성된 일본 시찰단을 데리고 1938년 10월 7~27일 20일간 일본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기독교 대회에 참석해 기독교도의 내선일체화를 역설했다. 그 자리에서 오문환은 조선 장로교회들이 모금한 오사카, 고베 지역의 수해 구제금 670원을 증정하기도 했다.
오문환은 ‘복음찬미’에 나오는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은 불온사상이라며 총독부 경무국에 고발했다. 실제로 ‘복음찬미’에는 천년왕국 신앙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었다. 예를 들면, 1926년도 제6판 ‘복음찬미’에 펜윅이 작사한 찬송가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가사들이 있다. 17장 5절, “예수씨 강림하실 날을 이제 매우 고대하되 주님 대궐 가울 때부터 넉넉 되오리다.” 79장 7절, “통일하옴 통일하옴 황제들 주재와 함께 통일 보좌에 함께 통일 하올세 제일 기뻐 올 것 그 낯을 뵈옴.” 89장 5절, “영광서 오시다가 약조하신 곳으로 여태 원하신 신부 공중에 만날 날 새로운 때 위 새로운 때 위에 함께 통일하시고 복 나눠주실 신랑 길게 진실토다.” 95장 4절, “나라들 심판하러 오사 재판소에서 올 때에 신랑을 위하사 증거인으로 되겠사옵나니까.” 150장 4절 “그 후부터 대벽 장자 보좌에 앉으사 통일 천년 동안 하실 후에 새해 새 땅을 지실 주.” 222장 후렴 구 “가신대로 두 번째 공중에 강림하사 자기께 어린아이 다 부르실 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