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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집사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1
김진혁 목사
뿌리교회

아버지는 평생 관리집사로 사셨습니다. 교회 내에 사택이 있는 관리집사는 이른 새벽 교회 개방과 운행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문단속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연중 가장 바쁜 시기는 여름 방학 기간입니다. 행사가 많으니 교회는 항상 열려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밤늦도록 교회에 머무르니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늦춰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바쁘시면 늦은 밤 문단속은 대부분 저희 3형제 몫이었습니다. 함께 여름 수련회를 준비하다 귀가할 때가 되면, 우르르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단속을 하는 일은 혼자 남겨지는 것 같은 외로움으로 느껴졌고, 그 때문에 참 싫었습니다.


교회에서 살다보면 이 곳이 내 집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켜지거나 혹은 꺼진 전등불 하나하나,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쓰레기 같은 것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삼형제에게는 반강제적으로 부모님에 의해 주인의식이 심겨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쓰레기를 보면 즉시 주워야 하고 교회 물품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으면 제자리에 가져다 둬야 하며 주일 다음날이면 무조건 부모님과 함께 교회 청소를 합니다.


부모님의 직업을 창피하게 여긴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과 동일한 복장으로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교회를 이리저리 누비며 마주하는 사람들의 대견스러운 눈빛이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힘든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된 이후 교회 식당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아버지의 몫이었는데, 한 번도 대충하지 않으시고 소쿠리 같은 곳에 손으로 직접 눌러 짜 물기를 제거하고 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 그리고 부모님을 같은 성도요 집사로 보지 않고 월급 받는 청소부로 취급하는 일부 부유한 사람들의 태도는 큰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볼일을 보고 올 테니 그 동안 자신의 차를 잘 보고 있으라며 아버지를 불러 세운 장로님의 차 문짝을 아버지 모르게 못으로 긁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더 곤란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복수했다는 쾌감에 그날 밤 형과 동생에게 자동차 테러의 주인공이 나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다고 궂은일 하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 없어진다거나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아버지께 무례히 굴었던 사람의 교회 비치용 요람 사진에 눈을 파 놓는다거나 외부에서 전화하여 누군가를 찾을 때 무조건 그이가 없다고 둘러대는 식의 사소한 복수로나마 가족의 처지에 대한 씁쓸함을 해소하곤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모 장로교회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개척하여 큰 부흥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 헌신한 탓인지 담임 목사님께서 은퇴하지 않고 종신 담임직에 욕심을 내는 분위기였는데 당연히 연세가 좀 많으셨습니다. 한번은 대예배 광고 시간에 연합 부흥회에 관련한 내용을 말씀하시다 아버지를 가리켜 교회 기사라 하시는데, 이 일은 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상이용사에 당뇨까지 있어 댁에도 잘 안 들어가시고 교회 당회실 내 따로 만들어진  침실에서 지내시곤 하셨던 담임 목사님을 위해 어머니는 가족의 식사보다 그 분의 당뇨식을 지어 드리느라 바쁘셨고, 아버지는 관리집사의 업무 이외에도 밤마다 한 두 시간씩 목사님의 다리와 어깨를 주물러 드려야 했으며 거동이 불편한 그분의 개인 차량을 몰고 어디나 모시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관리‘집사’라는 직분이 있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저희 아버지는 단지 ‘기사’였습니다.


군입대 후 동생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고령의 목사님은 하지 않아도 될 말로 상처를 주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들어 아버지의 등이나 머리를 마구 때리기도 했답니다. 당장 쫓아가 항의하며 문제 삼고 싶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지내시는 부모님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결혼을 앞둔 즈음에서야 예전 교회에 대하여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더군요. 동생에게 들었던 이야기 전부가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그럼에도 아버지가 그 일을 때려치우지 않고 버틴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자리의 특성상 박봉이긴 하나 30대 초반부터 평생 헌신하겠노라며 관리집사로 살다보니 다른 일은 상상할 수 없었노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이라 여기며 견디었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입니다. 월남전 참전으로 전쟁 후유증마저 겪었는데 이렇게 무시당하고 괄시받으면서도 어떻게 그저 참고만 있나 하는 생각에, 일을 그만두지는 않더라도 교회는 옮기자 어머니께서 먼저 결단하셨다 합니다. 아버지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아직까지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십니다. 자식들 앞에서 보이기 싫은 모습을 굳이 입으로 묘사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성질대로라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내었던 지난 시간과 마주하는 일이 힘겨웠기 때문일 겁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관리집사의 자리를 지켜내셨고 장성한 아들 삼형제 모두 목사가 됐습니다. 과연 아버지만큼 직분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멸시와 천대, 자식들은 모르는 힘겨움 앞에서 우리가 버틸 수 있을지 말입니다. 현재의 저는 아버지가 관리집사를 시작하신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같은 교회라고는 하나, 아버지께서 멸시당하며 온갖 궂은일을 하셨던 그 나이에 저는 목사라는 이유로 성도들의 한없는 사랑과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감히 아버지께 제 모습, 제 자리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가장 낮아져서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 없게 하라’하신 아버지의 당부가 귀에 쟁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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