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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 2
김진혁 목사
뿌리교회

1997년, 21살 나이에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2월이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기숙사 방배정을 받았습니다. 4명 정원의 제법 큰 방에 방장 또는 각별한 객원식구로 현 강남중앙침례교회 최병락 목사와 전주교회 김요한 목사, 울산 낮은담교회 김관성 목사, 부산신평교회 임진만 목사, 김천은혜드림교회 최인선 목사와 더불어 살 부비며 살게 됐습니다. 


금, 토요일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역지로 떠났다가 주일 늦은 밤이 되면 기숙사로 쏟아져 들어오곤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20~30만원 사이의 사례비를 받아 든 전도사 형님들이 방식구 먹인다고 치킨에 탕수육, 뽀글이라면까지 한 턱 시원하게 쏘면서 개 교회 사역 이야기를 풀곤 했습니다.


그 시절, 주말마다 근사하게 양복을 입고 사례비를 받아 한 두명도 아닌 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이는 형님들이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어려움 모르고 자라 늘 웃는 그런 신사들 같았습니다. 


평소 친한 옆방 식구들까지 모여 통닭과 탕수육을 뜯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진혁아, 니 이야기 좀 해봐라.”


“예? …저는, 중대부고를 졸업하고 신학과에 입학한….”


“그런 거 말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사실 아버지가 부끄러운 경우는 한 번도 없었지만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알게 된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중 목회자 자녀들이 제법 있어, 제 외모나 행동에서 좋지 않은 인상이 풍겨 관리집사인 아버지께 누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했고, 저의 아버지도 목회자인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그 질문이 괜히 싫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관리집산데요.”


“…응, 그래? 그래서?”


잠시 잠깐 고민되긴 했지만 이내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보여도 되겠구나 싶어 말을 이었습니다.


“아버지는 20년째 관리집사를 하고 계시고요. 해병대 나와 월남전에 참전하셨는데, 전쟁 후유증 같은 게 있어 좀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가출도 여러 번 하고, 심지어 고등학교를 1년 꿇어 지금 대학교 동기들보다 한 살이 많아요. 우리 형도 신학과 94학번이고요.”


이야기 중간 중간 왜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좋은 일은 생각나지 않고 관리집사 아들로 겪어야 했던 서러움과 지우고 싶은 아픔들만 자꾸 떠올랐습니다. 형들이 눈치를 채고는 제 말을 가로챕니다.


“그래 인사해라, 마 나는 알코올 중독에 노름꾼 아들이다. 엄마가 고래고기 팔아가 우리 먹여살렸다 아이가."
“나는 아버지 없다.”


옆에 있던 동기들도 인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제 아버지는 의처증이 있어 어머니가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어머니와 많이 싸우시는데, 몇 명 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순간, 못난 아버지 자랑하는 분위기가 되버렸습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삼형제를 많이 때린 아버지라고 부끄러워했는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아버지가 제일 나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한 형은 밤마다 술 먹고 노름하는 아버지께 머리를 밤낮 포크로 찍혀 어머니의 머리에서 흐른 피가 방바닥에 낭자한 모습을 매일 봐야 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동기는 심한 의처증을 가진 아버지가 어머니의 직장까지 쫓아가 옷을 벗기고 확인까지 했던 일화를, 어떤 동기는 아버지가 대놓고 바람을 피우니 차로 아버지를 미행해 현장까지 덮쳐야 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정말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양반이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 교회 사역으로 흩어졌다 주일 밤 만나면 서로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들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교회 청소 잘 하고 계시고?”


“아버지, 이제 의심 안하시고?”


“아버지, 살아 돌아올 가능성 없으시고?”


이보다 더 충격적일 리 없는 소소한 서로의 가정사까지 챙기는 돈독함이 생겨버린 우리의 상처, 나의 상처는 치유되고 회복될 계기를 맞았습니다. 이 때부터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과거를 숨기고 포장했던 일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를 간증 삼아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고 은혜를 고백하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말입니다. 그 때의 그들은 현재 서울과 울산, 부산, 천안과 전라도 외딴섬, 멀게는 미국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먼 길을 돌아온 인물도 있기는 하나 전부 목회자가 됐습니다. 


혹시 저처럼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곪아버린 환부의 통증과 더불어 힘겨운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시다면 모쪼록 빠른 회복을 빕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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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에도 우리의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충남 강경 옥녀봉에서 찬송과 기도의 부르짖음이 울려 퍼졌다. 114차 총회(총회장 이욥 목사)는 지난 5월 10일 강경 옥녀봉 ㄱ자 복원교회에서 신사참배거부 교단기념일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는 81년 전, 1944년 5월 10일 일제총독부 함흥재판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폐쇄된 날을 기리고 믿음의 선진들의 뜻을 되새기는 행사로 진행했다. 1부 감사예배는 총회 교육부장 김성렬 목사(만남의)의 사회로 평신도부장 김태욱 목사(두란노)가 대표로 기도했다. 이어 전국여성선교연합회 글로리아합창단이 찬양하고 총회 여성부장 하숙현 권사(범일)가 성경을 봉독한 뒤, 이욥 총회장이 “하나님 말씀 순종에 목숨 건 사람들”(렘 38:5~6)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욥 총회장은 설교를 통해,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이자 선지자로 무너지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을 보며 애통한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백성들의 불순종과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선포했다”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고난과 수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교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