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건 한 번은 선생님을 면담을 해야 하기에 아버지와 함께 학교로 갔습니다.
“아버님, 진혁이는 이렇게 해서 어디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 시골에 미달인 실업 고등학교 같은 데라면 모를까….”
그대로 아버지와 학교를 나와 당산역으로 말없이 걸었습니다. 집이 있는 사당역까지 2호선을 타고 11개 역이면 되는데, 아버지는 건너편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가자.”
“예.”
그렇게 2호선 순환선을 타고 거꾸로 30여 개 넘는 역을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집이 마치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빠, 나 전주 내려갈게요. 집에 있기가 싫어요.” “그래, 삼촌들도 그 쪽에 있으니 그게 낫겠다.”
1초도 생각 않으시고 집을 나가겠다는 제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아, 아버지가 나를 포기하셨구나. 이제 나는 내놓은 자식이 되는구나. 차라리 잘 됐다. 내 맘대로 살아야겠다.’ 속 시원하긴 해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전주로 내려와 3만원짜리 자취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아주 후에, 고등학교를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제 방황은 계속 이어졌고, 감사하게도 방황의 끝에서 신학교 입학이라는 선택이 지금의 ‘목사’가 되게 해 줬습니다.
언젠가, 제가 전주로 내려가던 때를 회상하면서 어머니께 그 때 분위기를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 때 나를 포기했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너는 아버지한테 잘해야 된다. 너 전주 내려갔을 때도 밤마다 울면서 기도한 것이 니 아버지다. 그냥 집에 계속 두자니, 사람 많은 교회에서, 관리집사 아들놈이 학교도 안 들어가고 방황한다고 눈치주고 그러면 주눅 들어 있을 거 뻔할거고, 친구들 다 학교가고 교복입고 다니는데, 교회 사택에서 사람들 눈치 보며 어떻게 살겠냐고 하면서…. 그래서, 무엇을 하든 차라리 니가 전주에 내려가 있는 것이 백번 낫다고 그러면서도, 정작에 힘든 건 너일 텐데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보내 버린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말이다. … 그런데도 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가출을 해서 아버지를 또 울렸었어.”
아버지가 나를 포기했다고 확신을 했었던 그 때의 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섭섭한 마음에 함부로 속단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그 때가 말입니다. 다시는 들어오지 않겠노라고 1년을 꼬박 그리 버텼는데, 아버지는 언제쯤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올까 눈물로 기다리셨습니다. 문득, 1년 늦게 다시 치른 고입 연합고사 때가 생각이 납니다. 온갖 불신과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학교나 친구할 것 없이 모든 게 힘들었던 그 때와 달리 마음이 차분하고 편했습니다. 아침 일찍 현관을 나서는 찰나,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십니다.
“진혁아.”
“예.”
“이거 먹고 가거라.”
그렇게 제 손으로 건네주시는 것을 보니, ‘우황청심원’입니다.
건강한 십 대한테 ‘이게 뭐냐’고 한 번 쳐다보고는 크게 웃으며 입속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서울시장도 고등학교 1년 늦게 들어 갔다더만, 긍게 걱정하지 말어! 언젠가 그 사람보다 더 크게 되면, 너같이 힘든 기간 보냈던 사람들이 ‘김진혁이도 방황한다고 고등학교 1년 늦게 들어갔다더라’ 하면서 위로 받게 하는 사람이 될 것잉게 말이여.”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신 서울시장님이 누구신지 그 분의 학력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저를 위로하신다고 얻어 오신 그 정보를 아버지는 1년 내내 가슴속에 담아두고, 입속으로 계속 맴돌렸을 것이 뻔합니다.
뒤늦게 선택한 신학교 입학으로 지금은 목사가 됐지만,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방황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많이 어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교를 재수한 것도 아니고, 형편없는 중학교 생활에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들어가고, 가출을 일삼다가 아버지를 울려버린 문제아요, 교회와 목회자에게 상처받아 신앙의 방황기를 겪었으나 지금은 목사가 되어버린 관리집사 아들이 이제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살아낼 일만 남았습니다.
‘아! 우리 아들만큼은 나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얄팍한 바람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만큼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