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나이에 집을 나섰습니다. 남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기에 저는 집을 나갔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어 봐야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식이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교회의 수많은 눈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관리집사 둘째 아들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전라북도 전주,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돼 있는 교동이라는 곳은 제법 오래된 집들이 즐비해 있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외가 친척들이 아직 좀 계신다는 것이 부모님께서 저를 놓아주신 큰 이유기도 했던 곳입니다.
볼품없는 노목이 가득한 채 동네 어귀를 휘돌아 위치한 작은 언덕이 있고 군데군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있어 밤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짜리 작은 방은 연탄창고를 치운 볼품없는 공간이었고, 식수를 비롯해 씻을 수 있는 물은 집 앞의 우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끼니는, 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해결했습니다.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15분 정도 대로까지 걸어 내려가면 900원에 칼국수 한 그릇을 할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공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가면 형들과 축구며 농구며 어울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취방 살림이라곤 기타 한 대와 라디오 한 대뿐이었습니다. 잠들기 전까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주원의 ‘아껴둔 우리 사랑을 위해’와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반복해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어른들의 눈을 벗어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오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마음대로 한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제 나이에 맞게 학업을 성취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못해 생기는 자책들이 오히려 어른들의 지도를 받을 때보다 더 귀찮은 규제가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이 특징이라 거울 속 내 모습이 짐승 같아 보였습니다. 옷도 마음대로, 머리도 마음대로, 이미 오래전 초점을 잃은 눈빛과 멋대로 놓인 이불과 옷가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줬습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을 때에 해버리는, 아주 고집스럽고 삐뚤어진 짐승 새끼…. 큰 외삼촌 댁에 한 주에 한 번씩 찾아가 얻어먹는 밥 다운 밥이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는, 인증된 불량아였습니다.
그러다 막내 외삼촌이 알아봐 준 학원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당했거나 아예 진학하지 않았거나 혹은 재수하는 친구들이 주를 이루는 학원이었습니다.
첫째 날, 먼저 다니고 있던 녀석들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자리로 들어와 수업을 한 시간 듣고 나니 마음이 제법 편했습니다. 적어도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우스운 뿌듯함이라고 해두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면서도 힐끗힐끗 저를 의식하는 분위기 역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서 왔다는 녀석이 자신들보다 더 허름하고 험악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그중에서도 적당한 덩치에 새하얀 얼굴, 눈 밑 짙은 흉터로 다소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녀석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송아지 같은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다가옵니다.
“야, 서울! 담배는 피냐? 나가자.”
평생지기 1호요, 한예종 연극원을 나와 ‘마리화나’, ‘청춘의 십자로’, ‘마리아 마리아’, ‘레미제라블’ 등과 같은 뮤지컬로 대학로에서 이름있는 배우로 성장한 영수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전주에서 다녔던 학원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들어간 소위 불량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명문 고등학교와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폭력, 사고, 퇴학, 자퇴 등등의 전력 화려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저에게 처음 먼저 다가왔던 영수 녀석은 ‘사고’에 해당했습니다. 당시 불량 청소년들의 필수 코스인 오토바이 사고로 오른쪽 눈 밑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하나 달았습니다.
제법 큰 사고라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해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못 들어갈 거 오토바이 사고가 너의 쪽팔림을 가려준 것이라고 지금껏 제게 놀림을 받습니다. 학원이 끝나면 우선 건너편 오락실로 몰려갑니다. 실컷 오락기를 두들기며 눈치 본다고 못다 피운 담배를 몰아 피운 뒤에 제 자취방으로 향합니다. 일주일에 3일은 제 방에서 먹고 자고 같이 생활했는데, 밤이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갑니다.
길바닥에 뒹구는 철사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배회하다 현금이 보이는 자동차 문을 따고 이것저것 훔쳐 통닭과 술을 사 먹습니다. 밤새워 놀다 보면 조금씩 과격해지고 대담해집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앞다퉈 경쟁하듯 일을 저지릅니다. 남의 집 옥상에 올라 옷가지를 훔치기도 하고, 부탄가스를 사서 흡입하기도 합니다. 그중 가장 집중했던 놀이는 문신을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바늘로 잉크를 찍어 올리면 끝에 잉크 방울이 대롱거리며 매달리는데, 이때 연한 살을 찔러 피부를 살짝 튕겨올 린 뒤 화장지로 닦아내면 그대로 점이 됩니다. 그렇게 글씨나 그림을 스케치하여 몇백 몇천 번을 튕겨내면 어설프게 문신이 새겨지는데, 그 시절 잉크 성능을 체크한다는 핑계로 제 손을 내어놓아 아직도 제게는 여러 개의 인공점이 수두룩합니다. 그러다가 우리에게 한 명의 친구가 더 생겼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적당히 찢어진 눈, 오뚝한 콧 날에 작은 입술은 영락없는 기생 오라비상입니다. 여자아이들에게 제법 인기를 끄는 외모와 달리 터프하기도 해, 동성 친구들에게도 호감을 사는 녀석이었습니다. 밤마다 제 방으로 모여드는 인원이 이제는 세 명이 됐습니다. 자취방 가장 인기 있는 식사 메뉴는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을 눌러 식용유와 소금을 듬뿍 넣고 요리한 김치볶음으로, 녀석들이 제 집에 돌아갈 때도 꼭 자취방에서 김치볶음에 밥을 비벼 먹고 갑니다. 이 맛을 영 끊을 수 없었는지 집에 있는 김치통을 가져다 놓기도 합니다. 최고의 놀이감은 기타입니다. 드라마 OST ‘질투’,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 번’이 애창곡인데, 한 번은 제가 분위기를 잡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다 부르고 나니 녀석들 눈빛이 제법 진지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