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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 망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9
김진혁 목사 뿌리교회

2014년 2월 16일, 저희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존재합니다. 제법 알려진 대로, 동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희 곁을 떠난 날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저녁 9시 정도 됩니다. 그러면 저희 아래층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손 발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개그콘서트를 함께 보다가 잠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를 보게 됐는데, 갑자기 속보 한 줄이 화면 아래에 굵게 자리하였습니다. 한국인 성지순례객이 이집트 타바 국경에서 폭탄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뉴스를 보다 속보라고 뜨는 내용이야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다친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곡소리가 들려 누가 이렇게 울부짖냐 하니 아내가 1층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우리 막둥이가 죽었다”고 큰 울부짖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라 TV를 바라봤습니다. 아무리 확인을 해봐도 한국인 사망자 명단에 동생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당연했습니다. 동생은 터키로 간다고 했지, 이집트 쪽으로 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빠, 그 녀석은 터키로 갔어요. 소아시아쪽 일정이라 이집트 이스라엘 같은 곳으로는 안가요.”


“아니여. 진규 맞어. 막둥이가 죽었어.”


저는 흥분해서 “그런 소리 마시라”고 소리쳤고, 제수씨에게 동생 일정을 확인하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소아시아 쪽 일정이었으나, 성지순례를 기획한 교회에서 일정 수정을 요구하는 바람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직감이었을까요? 무작정 제수씨와 조카에게 올라가 봐야겠다고 짐을 싸 서울로 향하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리고 계속해서 TV에 집중을 하고 있노라니 17일 새벽 1시경 연합뉴스 발표 사망자 명단에 동생 이름이 떠오릅니다.


엄청난 절망 중에 토해지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지난 설 명절 가족 모두가 모였을 때 나누었던 선교사 교육을 위해 교회사역을 그만 뒀다는 이야기며 지역 교회 사역자와 선교사 사이의 느낌까지 이것저것 말하는 동생에게 집중도 안 해주고 그냥 그렇게 보내 버렸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아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올려 보냈었는데….


어릴 적 동생과 다투었던 일들과 순전히 내가 잘못했던 그 많은 일들이 왜 그리 밀려드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잠 못 이루고 꼬박 밤을 지새운 뒤에 새벽예배 설교를 위해 교회로 향했습니다.


설교 직전 중보기도 순서에 이집트 타바국경 성지순례객을 대상으로 폭탄테러가 일어나 현지 가이드와 함께 출발한 교회 쪽 권사님, 그리고 4살짜리 딸이 있는 젊은 목사가 사망했는데, 이 영혼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남겨진 유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집에 가서 몇 벌의 옷과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권을 챙겨들고 터미널로 향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함께 사역하던 이성환 전도사(현 포항 유강교회 목사)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를 나온 제 후배인데, 동생이 목포해양대학 재학 시절 서울 집으로 올라갈 때면 늘 형과 함께 간다며 신학교에 들르면서 서로 친구가 되었던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는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 설교 들어가기 전에 알렸습니다.


“형, 같이 가자, 어찌 혼자 올라가노”


고마웠습니다. 시간 반 열심히 달려 동생 집에 도착하니 백석교단에서 신학을 전공한 동생과는 함께 공부한 바 없지만 저를 매개로 동생의 절친이 된 침신의 선후배들이 강릉 원주 일산 울산 등지에서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보니 동생이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많은 위로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좀 다르셨나 봅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부담스럽거나 싫은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생을 이을 수 없는 막내 생각에 자꾸만 힘들어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빨리 갈 걸 왜 하고 싶다는 거 못하게 하고 먹고 싶다는 거 못 사주고 혼내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놔둘 것을….”


그러고 보면 형이나 저 역시 동생에게 좀 더 친절하지 못했던 것이 이내 가슴에 걸립니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유독 저를 잘 따랐는데, 형인 제가 있건 없건 제 친구들과도 따로 만나 잘 지낼 정도였습니다. 막내만큼은 형들이 거쳐 온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해서 억지스레 누르고 지적하고 불친절했던 것들이 무척 후회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언젠가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말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빨리 잊으란 강요 섞인 권면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목회자들이 애용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생 사후로부터 상을 당한 분들에게 그런 류의 말을 잘 건네지 않습니다. 천국을 보장해 주는 멋지고 좋은 말이기는 하나 크게 위로받지는 못했습니다. 슬픔이 너무 크면 말보다 함께 울어주는 그것이 가장 깊은 위로가 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희망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우리가 가족으로 함께할 수 있었던 지난 서른 여섯 해의…시간으로 인해 정말 행복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녀석이 남겨둔 가족을 통해 이어질 신앙유산, 또 그를 기억하는 후대의 기억에서 자꾸만 그의 옳았던 행위들과 행적들이 쏟아져 나와 그를 본받는 제2, 제3의 김진규 목사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정리해 봅니다.


그것이 곧 아들과의 갑작스런 이별로 슬펐던 시간들을 지난 36년의 행복한 기억으로 대체해내려 노력하시는 부모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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