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제가 결혼을 한 뒤로는, 동생을 놀려먹는 재미가 좀 있었습니다.
“야 야 넌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그 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있냐, 팔도 남들보다 짧고 다리도 짧은데 허벅지만 굵고, 어떻게 하냐?”
그랬던 녀석이 어느 날, 천안으로 여자친구를 데려온다고 합니다. 약속한 날 저녁, 마중을 나간다는 것을 끝까지 마다하더니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왔습니다. 그래도 형들 집에 인사시킨다고 분당으로 천안으로 다닌 수고가 고마워 어찌나 기특하던지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동생을 따라 형님 집으로 들어오는 손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마디 건넸습니다.
“형 집에 오는데 귀한 선물은 들고 왔고?”
“당연하지, 여진이가 특별히 골랐어.”
그러면서 호두과자를 한 상자 건냅니다. 타지 사람이 천안 사람한테 호두과자를 선물하는 이 놀라운 광경에 우리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과수원 하는 사람 집에 과일 상자 들고 가지 왜?”
다행히 제 개그를 이해해 주는 듯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 성격은 좋겠구나 싶었습니다. 다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우리 집에 내려와 시간을 보낸 뒤에 양가 부모님께 둘의 결혼을 승낙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둘의 사이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상견례를 통해 날짜를 잡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해 추석에 어머니가 쓰러지셔서 간이식 수술을 받으셨고, 결혼이 잠정적으로 미뤄지게 됐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찍부터 제수씨가 되었을 사람인데, 혹시나 우리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마음이 변하지나 않을까 내심 불안했습니다.
동생은, 미래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집안의 모든 일들을 다 이야기 할 테고, 형제들 중에 한 명이 어머니께 간을 줘야 하고 수술 후 관리비용으로도 우리 형편으로는 어림없다는 것들이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제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둘은, 결혼식장에 골인할 때까지 한 번의 잡음 없이 예쁜 사랑을 했습니다. 기꺼이 우리 집안으로 들어와 준 제수씨도 고맙지만, 중간에서 잡음 없이 잘 조율한 동생도 참 기특했습니다. 제수씨는 형님들의 질투까지 유발할 정도로 어머니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야, 야 확실히 여자가 나이 들어서오니까 음식도 잘하고 싹싹하니 이쁘다!”
형수와 제 아내는 다소 어린 나이인 20대 중반에 결혼을 해서, 살림을 하는데 좀 서툴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까지 낳고 나름 주부9단이 되어가고 있는 손 윗 형님들 앞에서 제수씨를 필요 이상으로 이뻐하는 것에 제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내가 엄마한테 이야기 좀 할까? 적당히 하셔야지 며느리들끼리 불편해지면 어쩌시려고?”
“으이그! 그러면 여자들이 집안에서 남자들 움직여 사이 갈라놓는다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거야. 남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게!”
그런데 사실, 형수님과 우리 아내는 좀 서툴긴 했습니다. 열심히 뚝딱거리며 식사 준비를 하는데, 그릇이나 이것저것 음식쓰레기들은 싱크대에 쌓여가고, 정작 식탁에 차려진 반찬의 가짓수는 달랑 두세 가지에 정말 정갈하기 그지 없었으니까요. 한 번씩 집안에 다 모이면, 정말 제수씨는 다른 이들 몇 년에 걸친 능숙함이 한 번에 드러났습니다. 식탁을 차리거나 집안 정리를 할 때도 형수와 아내는 뭘 해야 하는지 약간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움직였던 반면에, 제수씨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나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하는 행동도 좀 달랐습니다. 할 소리 안 할 소리 딱딱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좀 불편했는데, 부모님께서는 꼭 막내딸 같다며 좋아하십니다. 동생과 결혼을 할 사람으로서는 편하고 좋았는데, 정작에 결혼을 해서 우리와 식구가 되어보니, 부모님의 반응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좀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불편함은, 표현을 하기가 더 불편했습니다. 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가 어른답지 못하게 질투한다거나 속 좁은 사람으로 비추어질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들은 조카 아영이가 태어나면서 모두 없어지게 됐습니다.
제수씨의 행동이나 부모님의 말씀이 변한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이 좀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영이를 이뻐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정말 우리 식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단순히 결혼 전에는 좋은 사람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동생과 한 몸을 이룬 식구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카 아영이도 이뻐 보이고, 제수씨도 이뻐보입니다. 사실 외모의 수준이야 제 아내를 따라오기 어렵지만, 제 마음이 변하니 모든 게 이뻐 보입니다.
그 제수씨가 지금은 혼자 있습니다. 2014년 2월, 동생이 이집트에서 세상을 떠나고 홀로 아영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 소식을 텔레비전으로 확인하자마자 제수씨가 불쌍하다며 당장에 동생 집으로 달려가셨고, 저는 새벽예배를 마치자마자 동생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동안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더 많이 품어주거나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제수씨를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제수씨는 제 손을 잡지도 못할 정도로 기진한 상태로 뭐가 미안하냐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동생 시신을 수습해서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던 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제수씨에게 어떻게 이 모습을 보일까’였습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그 시신을 들어 전달할까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보라매 원 장례식장, 우리가 탄 의전차량에서 동생의 시신을 내리던 그 순간 부모님과 함께 제수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간 형으로서 해준 것도 없고, 결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 줬는데, 형이라는 인간들이 기껏 한다는 짓이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서 전달하는 것이라니….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제수씨가 아영이 하고만 지낸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현재 동생이 사역을 했었던 시냇가푸른나무교회에서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데, 홀로 사역을 하면서 경제생활을 하고 아영이를 키우면서도 집안의 대소사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희보다 더 부모님을 많이 찾아뵙고, 자식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동생이 살아있을 때보다 우리 식구들과 더 친해졌습니다.
제수씨를 부를 때, 여동생 부르듯 ‘여진아, 여진아’ 하고 장난치면, 제수씨는 저를 ‘오빠’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방에 살고 있는 저희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역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전화통화를 하면 20~30분은 기본입니다. 형님과 제게는 꼭 여동생이 한 명 생긴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안 모임이 있으면 제수씨는 오빠들의 타깃이 되어 갈굼을 많이 당합니다.
‘화장이 그게 뭐냐,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오빠들한테 혼나고 싶으면 느슨해져라….’
그러면 꼭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무슨 오빠들이 이 모양이여. 동생 오는데 벌써 밥도 다 해치우고…그러니까 배가 이렇게 나오지” 하며 제 배를 툭 칩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제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진이가 너한테 오빠라고 하면서 장난을 치니까 그게 참 좋더라, 아빠도 말은 안 해도 너하고 장난치는 거 보면 얼마나 웃는지 모른다. 다행이지 뭐냐, 여진이가 저렇게 잘 버텨줘서...”
동생은 떠났으나 여동생이 한 명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요. 오늘도 전화를 해서‘ 오빠 살아있을 때 더 잘하라’며 좀 갈궈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어코 한 마디도 지지 않습니다.
“동생이나 잘 돌보시지!” 내일은 더 강력하게 한 방 먹일 생각입니다.
“전도사는 목사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