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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국 목사 회상록> 왜 내게 예수를!

 

202 병기단 88 대대 서진원 군목은 황 사병이나 김 일병을 제쳐두고 중요한 일은 가끔 이등병인 나와 상의를 했다. “한 전도사, 지금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노?”라고 하루는 내게 말을 걸어 오셨다. 내가 즉시 죽어가는 사람은 우선 살려놓고 볼 일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하자,

 

잠깐 사유 설명을 하시더니 그러면 지금 나와 같이 가자고 해서 원주 1군 사령부 앞 101후송병원 정문 맞은 편, 길 건너에 세탁소 가게를 찾아 작은 방에 들어가니 벽에 큰 글씨로 , 나를 일찍 예수님을 믿게 해 주지 않았느냐?”라고 벽지 위에 쓴 글씨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장마철로 19647월이었다.

 

16세 김익심 소녀는 원주여중을 졸업하고 서울 이모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자니 진학도 못한 처지에 홀어머니와 언니의 눈치가 싫고 해서 그만 무작정 춘천으로 가서 시청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던 중, 인생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 충동으로 봉이산에 올라 양잿물을 마시고 죽어 있는 것을 야간 순찰 중에 헌병이 발견하고 입원시켜 회생시킨 후 집에 돌아왔다.

 

그때서야 교인들의 권고로 태장감리교회에 나가다가 드러눕게 되고 차츰 식도가 오그라지고 말라져 가게 되었다. 우리가 찾았을 때에는 이미 식사는 물론 미음도 못 먹은 지 열흘이나 지났다.

 

서 군목님이 시키는 대로 나는 소녀를 업어 군용 앰뷸런스에 싣고 원주 기독병원에 가서 입원시켰다. 워낙 미음조차 못 먹고 말랐는지라 식도 수술은 꿈도 못 꾸고, 일차 배꼽 밑에 구멍을 내고 고무 호수를 위 속에 집어넣어 입으로 죽을 씹어 깔대기에 뱉으면 고무 호수를 통해 꼬르륵소리를 내며 위장으로 들어가게 했고, 그 후 퇴원을 하게 되었다.

 

군인교회 장병들의 헌금과 서진원 군목의 모금 및 원주기독병원 박 원장의 특별배려로 수술비 5만원만 지불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월급은 80(미화로 1불이)이었다. 이듬해 내가 원주 군인복지센터에서 근무를 할 때, 서 군목은 백마부대 군목으로 파월하시면서 김 양의 구명 후원을 내게 일임했고, 파월 후 전선에서 생명과 피를 뿌린 장병들의 헌금을 매월 나에게 탁송해 오셨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다 주었다. 구원의 확신과 말씀으로 격려했다. 깔대기로 계속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몸무게를 재니 어느새 58Kg이나 되었다. 원주기독병원 박원장과 상담한 결과 식도수술을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유명 외과 의사 5~6명을 초청해야 하므로 엄청난 수술비가 든다고 했다.

 

원주 군인복지 센터에서 모은 구명 모금과 서 군목이 보내준 돈으로는 식료품 조달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 원장은 그때까지 식도교환 수술을 해 본 일이 없었다. ‘마른 식도를 잘라내고 본인의 창자나 개 또는 돼지 창자 아니면 플라스틱 식도로 갈아 넣는 대수술이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저를 살려 낼꼬하며 근심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읽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16:26)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

 

김 양의 식도수술을 위해서 나는 먼저 언론사를 찾아 모금을 시도했다. 강원일보를 찾았고, 서울에 와서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천관우 씨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를 찾아가 호소문을 전달하였으나 언론사들의 반응은 하루에도 여러 사람의 비슷한 자살 미수가 생기는데 그걸 어떻게 다 돕느냐는 것이었고 더욱이 자살자의 구명은 신문에 내어준다 해도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살려주고 싶지만 죽으려 하는 사람은 죽게 두지 왜 살리려느냐는 냉담한 반응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교회에 한번 동정을 구하려고 원주 시내 모든 교회로 구명 호소문을 보냈지만 네 교회가 약간의 헌금을 보내왔을 뿐 별다른 반응이 사실상 없었다.

 

1966년 한 해가 저무는데 할 수 없이 1228일부터 나는 3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양잿물로 말라붙은 식도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내가 뿌리고 보낸 호소문을 보고 수술비가 응답되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런데 금식 기도 후 놀랍게도 먼저는 가까이 지내온 일군 사령부 군종감 조충원 대령께서 101 후송병원 외과과장 김 소령을 대동하고 찾아와서 한 관장님 내가 특별히 잘 부탁해서 무료 수술코자 김 양을 만나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대화중에 알고 보니 김 소령은 영남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너무 감사해서 김 양을 데리고 101병원에서 시약 검사를 몇 시간 받고 돌아왔고, 곧 수술을 하도록 병원장을 만나 날짜를 잡아 조속히 진행하도록 합의하였다.

 

그 때 나는 영자로 된 유인물을 만들어 1군 사령부 옆에 있는 캠프롱 미군 부대에도 보내었다. 전에 내가 1군 특파로 춘천 미군사고문단(“C”KMAG)에 통역사병으로 파견갈 때 캠프롱의 미군 군목 포프(Pope) 소령을 만나 일이 있었고 부대의 사령관 부스(Booth)장군과 인터뷰를 한 결과 합격하여 4개월간 파견근무(TDY)하게 된 일이 있었다.

 

나의 호소문을 받은 포프소령은 침례교인으로 원주 군인복지센터에 가끔 오시면 만나 교제를 했는데, 그때 마침 나를 찾아와서 한 관장님, 그 호소문을 사령관을 모신 참모회의에서 읽어주었더니 부스 장군 이하 모두가 우리가 돈을 모아 그 소녀를 살려내자고 결정했으니 안심하고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도응답이 너무 잘 되어 두 곳에서 다 무료로 수술을 해 주겠다고 하니 의외로 놀랐고 또 도리어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다. 두 부대에 알아 본 결과 어느 부대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먼저 허락한 101한국 군인병원에서 하면 포프 소령과 캠프롱 미군부대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고, 미군부대의 후원으로 원주 기독병원의 수술을 따르자니 양키 부대를 좋아하고 국군부대를 무시하게 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할지 진퇴유곡의 고민이 되었다.

 

당시 원시에만 9명의 다른 자살미수가 있다고 들어서 그 중 한 사람을 추천할 테니 김 양 대신 그 사람을 수술해 달라고 포프 군목에게 부탁해보니 우리가 한 관장 당신을 보고 수술 후원을 하는 것이라서 바꿀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할 수 없이 다시 기도하는 중에 응답받은 대로 나는 수술 받는 김 양 본인의 의사를 따르기로 하여, 그녀가 원하는 대로 미군부대의 후원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하게 결정되었다. 해가 바뀌어 하다윗(David Howle)선교사는 나를 춘천 군인복지센터를 설립하고 관장으로 가도록 부탁했다.

 

2군단 사령부 노제현 소장의 후원을 받고 선교부의 재정지원에 춘천 소양로에 있는 60평 정도의 2층 건물을 임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춘천침례회 장시정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으로 열심히 일했다. 춘천지방회와 YMCA 베타클럽 회원 및 유도탄 기지 사령부 킬덜 군목 그리고 샘밭교회 허걸 목사님도 오셔서 도와주셨다. 주님께서는 1년간 춘천교회에 열 가지의 기적을 주셨다.

 

그동안 원주와 연락하면서 나는 교회와 함께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김양의 수술은 2월에 진행하게 되었다. 8명의 외과의사가 8시간 동안 수술한 결과 그만 실패했다는 소리를 듣고 춘천에서 원주기독병원으로 내려갔다.

 

김 양의 오른편 직장을 끊어서 마른 식도를 잘라내고 갈아 넣었는데, 24시간 내에 부패되어 그만 뜯어내고 목을 봉합한 상태였다. 너무 큰 좌절을 느꼈다. 응급실에 누운 김양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식도에 뚫어진 구멍으로 숨소리를 내면서 자그마한 소리로 전도사님 다른 직장으로 다시 수술한데요!”하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좌절 속에서 포프 군목과 의논하고 박원장을 만나 몇 개월 후 건강이 회복되면 무료로 왼편 직장을 끊어 식도로 갈아 넣기로 약속했다. 어느덧 봄이 되어 2차 수술을 하였고 수술 후 24시간이 지날 때까지 수술 성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다행히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계속 전화가 왔다.

 

15일쯤 지나 원주 기독병원으로 내려가 보니 김익심 양은 성공적인 수술 결과를 나에게 확인해 보이기 위해 시도했다. 닭이 물을 입에 넣고 마시듯 하니 꼬르륵소리가 나고 다시 가슴을 뒤틀며 목을 앞으로 빼니 또 꼴꼴하면서 물이 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으로 음식으로 먹게 되었으니 미칠 듯이 기뻐하면서 감사의 눈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나도 같이 울었다. 그 후 곧 월남 백마부대 서 군목님께 알렸다. 이제는 밥을 배꼽 밑에 꽂힌 호스 깔대기로 안 먹어도 되었다. 그 후 보름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목과 직장이 붙은 곳과 직장과 위를 봉합한 두 곳이 오그라들지 않게 자 쇠막대기를 입으로 넣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고 전해왔다.

 

죽을 먹고 밥을 먹게 되었을 때에 춘천침례교회로 불러 간증을 하니 온 교인이 눈물 없이는 그녀의 간증을 들을 수 없었다. 제대 후 춘천을 떠난 뒤 원주에서 보낸 성탄카드를 몇 년간 받았는데,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소식은 끊겼다. 당시 의사의 말로는 그런 상태로 10~15년간 살 수 있다고 했으니 40년 넘게 흐른 지금은 천국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천국에서 밝고 환한 얼굴로 다시 만날 것이다.

 

한명국 목사

증경총회장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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