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현현 사건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두 제자의 가리워진 눈을 열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세 번째 하신 일은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음식을 잡수신 일이었다. 두 제자가 그들이 가려는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24:28). 여기서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두 제자가 가려는 목적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지 않으면 이제 그들과 주님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여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은 여전이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자기 자신의 일을 하시는 제 삼자로 머물러 계신 것을 가리킨다.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는 우리가 그 분을 초청하여 영접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훈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보았을 때 달려나가 영접하며 자기를 떠나 그냥 기자나기 마시고 쉬어 가시도록 초청한 사건에서도 제시된다(창 18:1~5).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께서 더 가시는 것을 멈추고 그들과 함께 지내시도록 강권했다: “그들이 강권하여 말하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24:29). ‘강권하다’(parebia,santo)는 동사는 신약성서에서 다른 곳에서는 루디아가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고 그녀와 그녀의 집이 다 침례를 받고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로 하여금 그녀의 집에 들어와 유하도록 강권하여 머물게 했다는 곳에만 나온다(행 16:5; cf. 창 19:9; 삼상 28:23; 왕하 2:17; 5:16).
‘유하다’(mei/non)는 동사는 표면적으로는 ‘숙박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두 제자는 그런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했는데, 그런 의미는 그들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유하시도록 초청하는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기 때문에 밤길에 여행하는 것이 위험하고 또 함께 숙박하며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초청한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직 그들과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사는 심층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는데, 신약성서에서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유하는 것은 주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됐었다. 이 동사의 이러한 심층적인 의미는 요한복음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기서 이 동사는 ‘거하다’로 번역됐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상호연합과 교제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됐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라는 말씀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연합과 교제의 의미를 가리킨다. 두 제자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님께서는 “그가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다”(eivsh/lqen tou/ mei/nai su.n auvtoi/j)라는 누가의 설명에서도 이러한 연합과 교제의 의미가 반영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기 때문에 함께 숙박하자고 초청했지만, 부활의 주님은 그들과 함께 연합하고 교제하기 위해 들어가신 것이다.
부활의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과 교제의 관계는 계시록 3:20에서 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됐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두 제자의 초청을 받아들여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신 후의 상황은 부활의 주님께서 주도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부활의 주님은 먼저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가지셨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24:30상). “음식을 잡수시다”(katakliqh/nai)로 번역된 동사는 식탁교제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기 위해 비스듬히 앉아있는 자세를 가리킨다(cf. 눅 7:36; 14:8).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묘사에서 예수님이 여러 가지 식사자리에 참여하신 것과 식사자리와 관계된 교훈을 전달하신 것을 제시한다(눅 5:29; 7:36; 9:16; 11:37; 12:37; 13:29; 14:1; 8-9; 22:14).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 비스듬히 앉으셔서 행하신 일이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매”(24:30하). ‘가지사’(labw.n)와 ‘떼어’(kla,saj)는 분사로 그리고 ‘축사하시고’(euvlo,ghsen)와 ‘주시매’(evpedi,dou)는 동사로 표현됐다. 이 네 가지 행동은 오병이어 사건(눅 9:16)과 최후의 만찬(눅 22:19)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으로 제시된 것들이다.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표적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중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감동과 놀라움을 안겨준 사건이며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새롭게 깊이 있게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눅 9:10~17).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적대자들의 공격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비장하고 엄숙하며 긴장된 모습이 제자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건이었다(눅 22:14~38).
부활의 주님은 그의 공생애에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큰 충격과 감동과 엄숙함과 비장함을 보여준 사건들에서 행하셨던 행동들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그런 행동들을 다시 보여줌을 통해 그들 곁에 계신 분이 바로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던 분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신비한 권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부활의 주님께서 행하시는 이 행동들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혼의 눈이 열리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누가는 두 제자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라는 말은 ‘열어주다’라는 동사의 신학적 수동태(dihnoi,cqhsan)가 사용됐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게 하신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나타낸다.
‘열어주다’(dianoi,gw)라는 동사는 누가-행전에서 다양한 대상들과 함께 사용됐다: 태(눅 2:23), 성경(눅 24:32; 행 17:3), 마음(눅 24:45), 하늘(행 7:56), 마음(행 16:14), 눈(눅 24:31). 눈이 열린 제자들의 고백(눅 24:32)과 연결해보면, 부활의 주님은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성경들을 열어주신”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들의 의미가 그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왔을 때, 부활의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인 줄 ‘알아보았다’”(evpe,gnwsan)라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으며 그 주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을 나타낸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부활현현을 통한 주님의 계시가 끝났고 부활의 예수는 더 이상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됐다.
처음에는 두 제자의 눈이 가리워져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그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그들의 마음에 믿어야 한다는 주님의 책망을 듣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예언된 성경 말씀들을 자세히 해설해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떡을 떼는 가운데서 그들의 눈이 열리며 그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두 제자가 즉시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과연 부활하셨다는 것과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됐다(눅 24:34). 시몬에게 ‘나타나셨다’(w;fqh)라는 말도 부활의 주님께서 시몬에게 현현하신 것을 가리킨다.
‘나타나셨다’는 동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5-8에서 부활현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제시할 때 네 번이나 사용했는데, 한글성경에 ‘보이셨다’라고 번역됐다(고전 15:5, 6, 7, 8). 따라서 ‘나타나셨다’ 혹은 ‘보이셨다’라는 동사 역시 부활의 주님께서 그 분의 살아계신 존재를 여러 증인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표현한다.
두 제자 역시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했다(눅 24:35). 누가는 여기서 그들이 엠마오에서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가진 식사를 “떡을 떼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도행전에서 “떡을 떼는 것”은 최초 기독교인들의 회합에서 특징적인 일이었다(행 2:42, 46; 20:7, 11; 27:35). 그러나 그 행습의 내용이나 종교적인 의미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가진 식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떡을 떼는 것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엠마오 식사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졌던 식탁교제와 초대 교회에서 떡을 떼는 것 사이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최초 기독교인들은 함께 모여 떡을 떼는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됐으며 이것이 주의 만찬 의식으로 발전하게 됐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