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엠마오 현현 사건을 통해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들이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듣고 만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을 마음에 믿어야 한다.
둘째는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시는 감동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한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든지 혹은 공동체적으로든지(누가는 공동체적 체험을 강조) 그와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체험에 이르게 된다.
누가는 이와 같이 최초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는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부각시켰다.
누가는 엠마로로 가던 두 제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길게 제시한 후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현현하신 사건을 제시한다(눅 24:36~43). 이 사건에서도 엠마오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성을 다루는 누가의 부활신학이 독특하게 제시된다. 누가는 먼저 이 사건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가 자기들의 체험담을 말하던 당시와 연결시킨다.
“그들이 이것들을 말하고 있었을 때에”라는 구절이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가 열 한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목격담을 말하고 있던 장면과 연결시킨다.
그 때는 이미 베드로가 부활현현을 체험한 상태였으며 아마도 거기에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들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두 제자의 증언은 베드로의 체험을 보완해주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두 제자가 말하고 있었을 때에, 부활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 24:36)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는 먼저 부활의 예수께서 서 계신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부활의 예수를 공생애의 예수와 연결시키려는 부활신앙의 대표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승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며(막 16:19; 마 26:64) 또한 서 계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요 20:19, 26; 행 7:56).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시는 신성의 존재성을 나타내는 반면, “서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동하기 위해 준비된 상태를 나타낸다.
부활의 예수는 하나님(권능자)의 우편에 앉아계신 신성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과 생명과 영광으로 행동하시기 위해 서 계신 분이기도 하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행동은 서 계신 가운데서 나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위해 행하신 첫 번째 행동은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부활의 첫 번째 선물로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평강은 어떤 낙심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으며 담대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제자들은 그때 처참했던 십자가 처형의 광풍이 지나간 후에 두려워 떨며 불안하고 초조하며 답답함 가운데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심은 물론 처형의 현장을 떠나 도망을 갔던 것에 대한 죄송함과 후회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러한 내면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일어나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실패한 제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평강을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중심적인 요소로 제시했다(눅 1:79; 2:14; 10:5-6; 19:42; cf. 행 10:36).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주신 생명이 평강이라는 것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더 강조적으로 제시한다(요 20:19, 21, 26). 누가는 특히 평강을 주시는 예수의 말씀을 현재 시제로 표현한다: “그 자신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auvto.j le,gei auvtoi/j).
누가는 이것을 통해 부활의 예수께서 평강을 주시는 것을 초역사적 현재로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평강을 주시는 주님의 행동이 처음 제자들에게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오늘날에도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첫 번째로 주시는 생명은 평강이다.
누가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놀랐다’(ptohqe,ntej)는 반응은 끔찍한 전쟁이나 소요 사태의 소문을 들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의 감정을 말한다(눅 21:9).
‘무서워했다’(e;mfoboi geno,menoi)는 반응은 천사의 갑작스런 나타남을 체험하거나 종말의 심판에 관해 들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무서움의 감정을 말한다(눅 24:5; 행 10:4; 24:25; 계 11:13). 부활 현현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은 그들이 “영을 보고 있는 것”(pneu/ma qewrei/n)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헬라인들의 인식에서 영(pneu/ma)은 일반적으로 육신의 몸(sw/ma)과 대비되는 존재인 영혼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라는 말은 그들은 이 현현 사건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영혼이 그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영혼 불멸적 신앙에 의거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는 이렇게 예수의 부활을 영혼 불멸적으로 생각하는 헬라주의적 부활관을 비판하고 예수의 부활은 철저히 몸의 부활 곧 인간의 신체와 영혼 전체를 포함하여 전인이 부활하는 것으로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누가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몰이해를 바꿔주기 위한 예수의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8).
여기서 예수의 말씀은 두 개의 질문으로 제시된다. 첫째 질문은 그들의 두려움의 감정을 지적한다. 여기서 ‘두려워했다’(tetaragme,noi)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의 감정을 나타낸다(cf. 마 2:3; 눅 1:12).
예수의 제자들은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 위에서 밤 사경에 풍랑을 밟고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동일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반응하기도 했다(마 14:26; 막 6:50).
그 사건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놀랐으며’(evtara,cqhsan) 또 그들이 보는 것을 “유령이라고 말하면서”(le,gontej o[ti fa,ntasma, evstin) 두려움으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avpo. tou/ fo,bou e;kraxan). ‘유령’(fa,ntasma)으로 번역된 단어는 어떤 형상의 모양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나타낸다.
둘째 질문은 부활의 소식을 들은 그들이 아직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를 지적한다. 그들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고 있다”(dialogismoi. avnabai,nousin)라는 말은 부활의 존재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서로 논쟁하고 있었던 모습을 반영한다.
‘논쟁’(dialogismo,j)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자체를 아직 영접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래서 부활 자체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부활현현을 체험한 결과로 예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그 부활의 존재성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며 논쟁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특히 복음이 이방의 헬라인들에게 전파됐을 때 죽은 자의 부활을 영혼불멸이라는 헬라인들의 대중적 신앙에 따라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난 것을 반영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으며 그 대신 육신을 벗어난 그의 영혼이 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으로 이해하려했던 것을 나타낸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