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길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무척 껄끄러운 통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권고하지 않았던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그런데 이 복음의 길을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정상복음 통로를 마구 뜯어고쳐 온갖 갈래의 길을 터놓았다는 것이다. 복음의 길을 단지 편안하게 걸어가도록 하기 위해, 칼날같이 갈라놓고 솜같이 감싸는 복음의 정체를 마구 뜯어고쳐 놓았다는 것이니.
복음은 율법과 은혜를 무자비하고도 냉정하게 그리고 사정없이 갈라놓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만으로의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복음의 길을 제시했건만 사람들은 이 복음이해가 율법세계에 찌들어온 사람에게는 먹혀들지 않으니, 복음의 외길에 수많은 샛길을 만들어 놓고 편한대로 복음의 길들(?)을 걸으라는 선심공세 성심공작을 감행한 오늘의 교회란 말이다.
나는 우연히 모일간신문 분수대란에 노재현(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씨가 “계단, 난간 투성이. 너무 친절한 등산길. 이건 산이 아니다.”라는 칼럼을 읽고 얼른 복음의 등산로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는 것을 재확인케 되었다.
그 칼럼의 내용은 등산객으로 하여금 아주 편하고 안전 되고 쾌적하게 등산할 수 있도록 멀쩡한 산을 깎고 뜯어고치고 파괴하여 인조계단을 만들어 말하자면 산을 온통 정형수술에다가 성형수술까지 시켜놓은 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칼럼은 등산객에게는 자연산의 등산을 즐거움과 고됨, 그리고 위험을 안고 산 오름이 재미인데로 통 그런 것이 없도록 만들어 놓았기에 등산맛을 빼앗았다는 논평이다. 등산객에 대한 과잉친절, 과잉보호는 등산객을 나약하게 만들고 등산맛을 여지없이 빼앗는 것이 된다는 것.
그래서 내가 그 칼럼에 덧붙인 것은 “산을 산 되게 두고 등산객을 등산객 되게 두라”고 한 것이었다. 인공시설을 갖춘 산은 원시(原始)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했고 등산객은 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인조구조물을 즐기는 것이 되었다는 결론이었다.
등산객은 자연산은 어디가고 문화화 된 산, 상품화된 산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복음의 길을 복음의 길 되게 하라. 성경을 성경되게 두라. 왜 뜯어고쳐? 왜 고쳐? 복음의 길을 걷자면 좌우로 유대인과 헬라인이 있고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되게 마련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복음을 정형(整形)하거나 성형(成形)하면 그땐 원시복음이 아니다.
교인에게 과잉보호나 과잉친절을 베풀다보면 교인이 교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외길을 걷는 순수한 복음 교인이 못되게 만드는 엉뚱한 결과가 나와 버린다. 교회지도자(목사, 교사, 교수)가 이런 작업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볼지라.
그러기에 외치노니 자연산 복음을 자연 되게 하라고. 복음은 양식(養殖)되지도 않는다. 복음은 늘 자연산이다. 바울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함이다.“(갈1:7)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