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歐美), 특히 유럽 신학은, 대부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버린 지 오래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단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유랑생활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적 문서에 불과하다. 한국 신학계 일각에서도 한 때, “이제 교의학의 시대는 지나고 행위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근본 보다 방편을 중시하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신학적 커밍아웃
이러한 풍조와 병행해서, 한 때 우리 신학계에는 주일 아침에 교회가 아닌 사찰의 대웅전에 서 예불을 하는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신학자들의 연례 세미나에서 “이제 하나님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하고 공공연히 자신의 “신학적 커밍아웃”을 선포한 교수도 있었다.
필자는 그들의 신학이나 행위를 성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 태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리한 “이단 감별 기준” 대로라면 그런 신학자들이 제일 먼저 신학을 검증받고 이단 사이비로 고발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교회지도자들만이 그들의 신학에 문제를 제기했을 뿐 한국교회와 이단 연구가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기독교 교파와 종교 단체에서 조차 다투어 커밍아웃 인사들을 수련회 등에 강사로 초빙하는 등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처음 믿음을 가지고 불붙는 열정으로 전도에 매진하다가 신학용어를 잘못 사용하거나 [커밍아웃 교수들에 비해] 사소한 교리해석에 잘못을 범한 이들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이단 사이비라는 화인(火印)을 찍었다. 이는 명백한 이중적 판단 기준이 아닌가.
학문의 자유
커밍아웃 신학자들에게는 “제단 뿔”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학문의 자유”라는 도피처였다. 과연 한국교회가 말하는 학문의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신학적 주제는 교단(校壇)에서는 연구하되 굳이 강단(講壇)에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런 선택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신학자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데 있다. 교단에서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면서 강단에서는 사도신조(경)를 암송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를 한다면 어느 한 쪽, 즉 교회에서는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외치면서 신자들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학문의 자유”는 어떤 학문에서나 누구에게나 보장된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양심에 우선한다거나 이중적 판단기준을 용납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신학자든 목회자든, 이단 연구가든 전문사냥꾼이든 이단을 감별하려면 “공평한 간칭(杆秤)”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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