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 월드컵 축구대회가 6월 달에 한창이다. 거의 지구촌 식구들의 삼분의 일에 해당되는 약20억의 지구촌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자국이 이기면 춤을 추고 자국이 패하면 축 늘어진 어깨가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일본이 코트디부아르와 일전을 벌였다.
나의 가장 먼저 떠오른 기대는 제발 일본이 이겼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뿐이고 재빨리 내 마음 속에는 다른 주문이 나를 압박했다. “왜 일본이 이겨야 하느냐?”고. 내가 처음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던 것은 일본은 오대양육대주 중에 아시아 주에 속하고 바로 이웃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다른 주문은 답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은 패해야 한다.”라고.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고 해방직전 다섯 살에 귀국했는데 그땐 일본의 강점기였고 그 나라로 인해 나라에 설움과 압박을 당하던 때였다. 지금도 한일관계는 껄끄럽기 제한이 없다. 내 마음은 결단을 내렸다. “일본 지거라, 일본 패하라.” 거의 응원이 나왔고 상대 코트디부아르 나라를 도왔다. 생각대로 1 : 2로 일본은 역전패 당했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한국의 승리 못지않게 일본의 역전패가 기뻤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했다. 전화로 친구를 불러 일본 축구관망사정을 물으니 똑같이 일본이 역전패 한 것이 통쾌하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게 “마음흐름”이다. 마음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육체의 흐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깊은 곳의 물의 흐름이다. 이를 沁留(심류)니 心統(심통)이니 心傳(심전)이니 하는 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모두 마음흐름의 현장이다. 마음흐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 한국을 아무 이유 없이 강점하여 수탈하고도 사과 말 한마디 없는 일본은 지금은 아무리 외교상에 공존하고 있지만 그 나라와 마음흐름은 없는 것이다. 신문에 의하면 우리가 일본축구의 패를 희망한 것은 38%라 하고, 또 일본이 한국축구의 패를 희망하는 것은 40%라고 하니 저들과 우리 사이에 적어도 축구 게임을 두고도 마음흐름은 막힌 것이었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접촉관계(接觸關係)이지만 사람과 사람사이는 영혼의 친교관계(魂親交關係)를 이룬다. 마음흐름이 없는 인간관계는 이미 인간이 아닌 물건관계이다. 사람들이 신체접촉은 하면서도 마음접촉은 없으니 인간이 메마른 모래알 같고 그런 인간으로 구성된 세상은 삭막세계 일수 밖에.
마음흐름은 하나님의 창조의 뉴코어(New core)이며 인간의 기본요소(essence)이다. 마음 빼어버리고 살갗만 부딪히니 피를 흘릴 수밖에, 같이 살면서도 마음흐름이 없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도 마음흐름이니 그게 내리사랑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런 마음흐름을 정했던가? 마음흐름을 창조하신 분이 계신다. 하나님이시다. 이긴 팀의 온 국민은 환호하고 춤추고, 진 팀의 온 국민은 거의 비애에 차서 맥을 놓고 있는 이 간단한 장면도 국민대 국민사이의 마음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전을 바라본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감정은 일본의 패를 즐겼다는 것. 그리고 끝내 16장에도 못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감정을 표출(表出)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깊은 곳 마음 흐름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