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대소간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첫째는 평생 경찰서에도 들어가 본 일이 없었는데 74년 긴급조치하에 두 번이나 중정을 거쳐 검사 앞에 섰다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두 번 판사 앞에 재판 후 8개월 만에 풀려날 때까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다음은 서울침례교회 부임후 3년간 교회가 부흥일로에서 유치원 화재사건으로 장년 교인 수는 600명까지 반타작을 내고 3년이 넘게 화재수습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과 환란을 견딜 때 “왜 하필 나에게?!란 질문을 스스로 수없이 되새겼다.
“고통 없이 수익은 없다”(No Pain, no gain)는 속담을 50년 전 영문학교수에게 의미 있게 듣고 마음에 간직했는데 막상 지난 침례신문 3주간에 걸쳐 기고한 두 사건을 당했을 때엔 수 없는 “왜?”란 질문을 던지고 성경과 인류역사와 위인들의 삶에서 비쳐보고 그 해답을 궁구해 보았다. 감옥에서 신구약 37독에 신앙서적 50여권을 읽었고 화재수습 3년간 고통에 대한 10여권의 책을 찾아 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생각나는 바를 두서없이 요약해 본다.
고통과 환란에 가혹한 시련은 육가원칙 중 누구로부터 내게 어디서 왜 오는가? 하나님, 마귀, 자신의 실수, 인간의 탐욕과 죄악, 자연재해, 다른 사람, 정부나 국가, 포악한 독재자, 인과법칙이나 자연법칙, 성장과 발전의 수단 등 10가지는 접어두고, 현실적인 몇 예를 들면,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 곧 지진, 한재, 수재와 홍수, 폭풍우, 화재, 전염병, 전쟁,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고통과 질병, 가난과 궁핍, 불의의 사고 곧 차량사고, 기차, 선박, 비행기 사고 등의 사람의 부주의, 무지, 실수 및 교만 등등, 개인적으로, 가정적, 집단적, 사회 및 국가와 민족적 고난에서 세계적 고통, 나아가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인격적, 물질적 및 신앙적 고난 등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고 성공하고 고난 없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에도 고난과 역경, 시험과 곤고, 고통에 핍박, 기근에 적신, 환란과 낭패, 좌절과 실망, 낙심과 원망, 적신에 위험의 칼, 극심한 징계 같은 숲속에서 헤매고 늪 속을 허우적거려야하며, 가혹한 풍파와 암담한 어두움을 탄식으로 헤쳐 나가야 할 때가 있는가?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바다며, 들판을 지나면 황야와 사막이며, 짙은 안개 속을 지나면 광명한 햇살이 안 보이고 칠흑 같은 흑암의 앞길을 가리울 때가 있는가? 마치 차도를 따라 잘 달려가는 휫바람의 차에게 대형트럭이 달려들어 충돌하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고통을 받는가?
우리가 가끔 우리를 극심하게 당황케 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실망과 좌절, 낙망과 고난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절규하게 된다.
“선하신 하나님,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왜 예수님을 잘 믿고 선하고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생기고, 주의 몸된 교회에도 여러 가지 극심한 환란을 부으시는가? 개인이나 가정에 불어 닥친 고난, 사회와 국가에 일어난 재난, 어쩌면 국제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연쇄 반응하는 고난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이러한 고난의 깊은 의미와 원인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기에 힘든 신비요 어쩌면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 섭리에 속한 것이라 본다. 어떠한 고난이든 믿음으로 수용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닥쳐왔을 때 이를 거절하고 자기 앞에 밀어닥친 고난을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경향이 크다. 이렇게 도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고난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의 피해자로 둔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생에 시련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통해서 신앙은 성장하고 인격은 연마되고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축복이 된다.
아브라함 마슬로(Abralem Maisow)씨는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를 실현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고 극복했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을 당할 때 불평과 원망을 자신에게나 남에게 토로하면서 환경에 대해 원망하고 사람에게서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의 영혼을 손상시켜 평안과 기쁨에 소망까지 잃고 깊은 타락의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고난이 부닥쳐왔을 때 수용하고 긍정적이고 슬기롭게 대처하고 극복하면 악마로 왔던 고난도 천사로 변하고 저주의 시련은 축복으로 변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창조와 도전이며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신령한 은사와 축복으로 이끄시는 통로이다.
고난의 신비 없이 어찌 믿음 소망 사랑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 마찰 없이 차는 굴러가지 못하고 고난 없이 영혼은 고양되지 못한다. 눈물 없이는 영혼의 눈이 그 풍부한 영감으로 반짝이지 못한다. 우리에게 섬광처럼 닥쳐오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시험과 고통은 간단한 충격만 주지만 마라톤 경주처럼 지치게 하는 고난, 곧 쉽사리 물러서지 않는 해결되지 않고 혹독하게 파도쳐 오는 고난과 시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격을 파괴시키고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매한 인격으로 고양시키고 더 큰 은혜를 주는 관문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었든지 그 고난이 얼마만큼 오래 계속되든지 무슨 상관인가?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바람이 강하게 불면 불수록 훌륭한 선장에게는 바다의 목적지나 안전한 포구를 향해 신나게 빨리 달리는 것을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동해바다를 하룻밤 지날 때 경험한 일이다.
꽃샘추위가 왜 오는가? 그러나 곧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화창하고 따스한 봄날이 속히 올 징조가 아닌가? 여명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두운 법이다. 잠시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온다. 이른 봄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나뭇가지에 물이 빨리 오르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는 땅을 100m나 파고 들어간 세계 3대 폭포로 끊임없이 물안개를 품어 올려 인근 숲을 울창하게 하고 사파리 관광지를 만들었다. 거친 땅위에서 모질게 굳어진 낙타나 코끼리 발굽을 그곳에서 보았는데 어떠한 모래와 사막과 자갈길도 걸 수 있게 되었다.
축복만을 갈망하는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신앙, 그런 신앙인은 고난과 환란을 당하면 그만 풍비박산으로 산산조각 나고 마는 것이다. 수목이 자라는데 햇빛만 비치는 맑은 날만 있어야 하는가? 비만을 아니면 구름만을 기다릴 것인가? 잔잔하고 따스한 날만을 좋아할 것인가? 나무뿌리가 폭풍우를 견디도록 깊어지기 위해서는 모진 비바람의 고난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면 우리 인생은 사막이 될 것이고 동정의 눈물은 말라붙을 것이며 우리의 눈은 영적 장님이 되고 우리의 성품 또한 콩나물 같이 연약하여 빗뚫어질 것이며, 무사안일과 축복과 이기심이 가득한 탐욕의 비정상적인 신앙인 되고 말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한명국 목사
BWA 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