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한복음에서 빈무덤 사건의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그 다른 제자를 따라온 베드로의 행동을 묘사한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20:6~7).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라는 한글 번역은 저자가 이 문맥에서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
여기서 ‘따르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서에서 제자직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애용되었다. 베드로가 “그를 따라 왔다”는 말은 단순히 그가 그 다른 제자보다 달리기에 뒤져서 늦게 무덤에 도착했다는 것보다는 그 다른 제자에 대한 베드로의 의존성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이제 십자가 곁에서 신앙의 중심을 지킨 그 다른 제자를 따라가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존재의 결말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그 다른 제자를 따르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신앙과 그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 베드로는 그 제자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20:8; 21:7).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 지체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다른 제자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다른 제자가 본 세마포가 놓여 있은 것 외에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수건은 예수의 장례 사건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수건은 전통적으로 얼굴의 땀을 닦거나 시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 단어 자체는 라틴어에서 온 외래어인데, 누가는 주로 손수건의 의미로 사용했다(눅 19:20; 행 19:12). 특히 그것은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가리는 수건으로 사용됐다(출 34:33~35).
저자는 그 수건의 상태와 위치에 관하여 언급한다. 저자는 그것이 세마포와는 “따로 한 곳에 개켜있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무덤 안에서 그것의 합당한 위치에 있었다. 예수의 몸을 쌌던 수의들의 정돈된 모습에 관한 묘사는 부활에 관한 요한의 견해를 제공한다. 그것은 예수의 시체가 도둑을 맞았다든지 혹은 옮겨졌다는 소문에 대한 변증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있어서 그 자신의 능동적 참여를 나타낸다.
수건의 사용은 나사로 부활 사건과의 연결성을 나타낸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은 아직 수건에 싸여 있었으며 그것이 벗겨져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나사로의 부활은 일시적인 소생이었으며 그는 여전히 죽음의 위협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얼굴에서 수건이 벗어진 상태로 부활했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이 그 스스로 자유롭게 되셨다. 그 수건이 조심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도 예수의 부활과 관계된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것은 예수의 몸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그의 부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것을 나타낸다.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 아버지의 활동을 가리키는 반면, 수건이 개켜 있었다는 것은, 그의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서(10:17~18), 그의 생명을 다시 얻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가 그렇게 한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부활에 있어서 아버지와 예수의 협동에 관한 요한의 개념은 아버지의 영광을 강조한 바울의 개념과 대조된다(롬 6:4; cf. 행 3:15). 요한은 처음부터 세상에 생명과 빛을 주는 일에 있어서 말씀(예수)과 아버지의 협동을 강조했다. 베드로가 수의들의 정돈된 상황을 주시하면서 이런 의미를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아직은 부활 신앙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암시된다.
저자는 베드로의 역할은 여기서 마치고 그 다른 제자를 통하여 그 의미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20:8). 저자는 그 다른 제자의 행동을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1) 그는 먼저 무덤에 왔다(v.4); (2)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v.5); (3)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v.8). 저자는 그가 무덤에 먼저 왔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그 다른 제자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서 그 안을 주시하던 행위가 현재 시제로 묘사된 반면, 이제 그 다른 제자의 행위는 “보았으며 믿었다”라는 부정과거 시제로 묘사된다. 그 다른 제자는 이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믿기 시작한 것인가? 문맥적으로 볼 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다음 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그들은 아직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알지 못했지만, 그 다른 제자는 그 무덤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예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한 첫째 사람이었다.
빈무덤, 세마포가 놓여있는 것, 그리고 수건이 개켜있는 것은 모두가 사람들이 예수의 몸을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는 마리아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과 예수가 반복하여 예고했던 말씀 곧 그가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의 성취를 가리킨다.
저자는 그 다른 제자의 믿음을 말하면서도 그들이 아직은 성경에 기초한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를 설명한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20:9). 그 사랑 받은 제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은 모범적 인물로 제시된다(21:8). 그의 믿음은 도마가 가졌던 의심과 크게 대조된다(20:24~29).
그는 부활의 사실을 믿었지만, 그러나 아직 부활현현의 경험과 성경 말씀에 기초한 확실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 다른 제자의 믿음은 단순히 그 무덤의 상황에 근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믿음의 근거로는 빈약하고 부족했다. 그들이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더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먼저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며 다음에 부활의 성경적 근거 곧 그리스도가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제자들이 부활현현을 경험한 후에 곧 부활하신 예수와의 대면을 통해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을 전달한다. 요한은 특히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제자들이 세 번씩이나 예수의 나타나심을 경험했으며 세 번째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제자들이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묘사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와의 대면을 통하여 그의 부활하심을 확신하게 됐으며 그 후에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야 한다는 부활의 필연성에 관한 성서적 증거들을 갖게 됐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영화롭게 되심이 완결되기까지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기억하거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14:25~26; 16:12~15).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부활신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활의 성서적 증거들을 추구했다.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권능의 활동의 결과라는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통하여(고전 15:4) 또 누가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표현했다(눅 24:26). 요한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확신했다.
요한복음서에서 ‘성경’은 구약의 특정 구절을 가리키는데 사용됐지만, 본문에서는 아무 성경 구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약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며 또, 누가가 말한 대로(눅 24:27),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들”을 말할 수 있다. 최초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말씀에 반영된 것과 같이(요 2:22; 12:16), 성경을 연구하고 보혜사의 조명을 통하여 제자들이 목격하고 증언한 사건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는 빈무덤 사건의 결론을 묘사한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0:10). 한글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원문에는 두 제자라든지 시몬 베드로나 그 다른 제자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단순히 “이에 그 제자들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갔다”로 묘사된다. “자기 집으로”라는 한글 번역도 원문에는 애매한 어구(‘그들에게로’)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어구를 “자기 집으로”가 아니라, 요한이 독특하게 사용한 용어인, “자기 사람들에게로”(공동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자는 그것을 “그들 자신들에게로” 곧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생각한다. 어떤 의미를 취하든지, 그것은 빈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가진 예수의 존재의 결말에 관한 무지와 의문을 나타낸다. 누가도 이 점에 주목하면서 베드로가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했다(눅 24:12).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