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와 알리스터 맥그라스
또한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고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된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어서 마치 우주를 누군가 만들어 놓고 생명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우주의 미세조정, 또는 인간학적인 원리(anthropological principle)라 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 지구의 지축 각도와 자전과 공전, 그리고 달과 지구의 거리에 의해서 조정되는 밀물과 썰물, 그리고 복잡하기 그지 없는 태초의 생명 탄생에 기여하는 탄소의 양을 표시하는 숫자는 지극히 정밀하기 때문에 숫자가 0.0000000001이라도 틀린다면 지구는 생명체가 결코 살 수 없는 차가운 혼돈의 별이 될 수밖에 없다.
우주가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10의 4만승의 확률이고, 이는 1에 4만개의 0을 붙인 수이다. 우주의 광대함 앞에서 사람은 말을 잊고, 그것은 사람의 상상을 벗어난다. 그런데 이 우주가 균형을 갖고 완벽하게 작동한다. 우주와 지구의 생명체들의 오묘한 신비가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비과학적이다. 32.05823 cm의 붕어를 낚기 위해서 강물에 낚시를 드리우자 바로 그 32.05823 cm의 붕어를 우연히 낚았다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낚시꾼의 뻥이다.
우연도 우연 나름이지, 그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밀하다. 복잡한 지구와 우주가 생명의 탄생에 이토록 적합하게 되어 있다면, 그것들을 우연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무식하다. 그게 미신이다. 차라리 초자연적인 신적 존재가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훨씬 더 과학적이다.
캠브리지 대학교의 천체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은 고도의 지성적 존재가 화학, 생물학 뿐 아니라, 물리학을 가지고 만들었으며, 자연계에 우연히 생겨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신앙은 현대 과학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과학은 신앙을, 신앙은 과학을 서로 보완해 주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갈망
하나님 신앙을 변증할 수 있는 또다른 논증은 어거스틴과 파스칼, 그리고 C. S. 루이스에 의해서 다듬어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는 주제이다. 성벽이 없는 민족은 있어도 하나님이 없는 민족은 없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그토록 깊이 드리워 있는 하나님 의식은 참으로 질기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기 때문에 과학이 발전되면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하지만, 인간 의식 속에 깊이 내재된 하나님 의식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은 마치 목마른 사람과 같아서 끝없이 갈구하며 자신을 뭔가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바닷물을 마시듯이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더 갈증에 시달리고, 갈증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내 속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경험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면,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다.” 사람은 자신을 권력, 돈, 명예 등으로 채워보려 하지만, 궁극적인 채움은 마치 무지개처럼 늘 멀리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또는 영원을 향한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경험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채워주는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이 세계 내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만들어 놓으신 뻥뚫린 허공이 있고, “이는 하나님 당신으로만 채울 수 있나이다. 당신 안에서 평안을 누릴 때까지 내게 평안이 없나이다”(어거스틴).
하나님 신앙의 변증은 그러나 실상은 이성의 설득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성의 설득과 더불어 개인적 관계를 맺고 우정을 나누면서 변증을 더할 때야 비로소 변증이 결실을 맺는다. 말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신앙의 변증은 교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불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우정을 나눌 때 참된 변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변증은 일방적이 아니라 듣는 청중의 입장과 상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는 마치 청중이 고려되지 않는 설교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뿐이라는 사실과 함께 한다.
설교와 변증은 홀로 일방통행식으로 가는게 아니다. 이는 청중이 있고, 그들 편에서,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 시작하고 여행하고 함께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청중을 우선시 하는 최근의 커뮤니케이션은 말하는 자의 입장보다는 듣는 자의 입장을 중요시 여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와 설교와 변증이라 해도 청중을 배려하지 않을 때, 이는 공허하게 끝난다. 낮은 자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는 친구로서 메시지를 전할 때 그런 내용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말이다.
김병제 목사
총회 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