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 봉헌에 암소까지 죽어
1960년 2월 저동교회 임암천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강성찬 전도사님을 부흥강사로 초청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청빙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경북 산골 고령까지 먼 길을 찾아갔다. 농촌교회를 개척한 총각 강전도사는 마침 자체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집사님 내외분을 불러서 “멀리서 한 선생이 손님으로 오셨는데 방이 이렇게 차가워서 되갔소, 군불을 잘 넣고 또 반찬도 계란 같은 것이나 생선도 밥상에 오르게 하이소”라고 힘있게 일러주었다. 식사 대접을 잘 받은 후 저녁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따뜻한 방에서 잘 자고 나서 이튿날 나는 강성찬 전도사님을 저동교회 부흥강사로 모시기로 허락받고 모교회 임암천 담임목사님께 통지해 드렸다.
세월이 흘러 강성찬 전도사님은 목사님이 되셨고 부산침례교회에 부임하신 후 그분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해서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평안도 정주의 농부의 아들이었고 선친은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었다.
마침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농토는 공산당에게 빼앗겼고, 그때는 소 두 마리가 전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 중 송아지를 기쁜 마음으로 건축헌물로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연자 맷돌을 돌리던 건장한 어미소가 갑자기 혀를 길게 내밀고 침을 흘리며 눈동자가 흐려지고 비틀거리다 그만 죽고 말았다.
동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복도 못 받고 게다가 소를 교회에 바쳤는데 어미 소마저 죽고 말았다고 수군거리면서 떠들썩했다. 수의사가 와서 소가 병들어 죽었다고 하며 고기도 못 먹게 되었다고 했으나 백정은 와서 잘 살펴보더니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배를 갈라보았더니, 배안에서 우황(牛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동리 사람들이 한 두 개씩 주어가고 한 바가지 우황을 받아 두었는데 죽은 소에게서 나온 우황은 당시 소 7마리 값이나 되었다.
우황이 나온 소는 고깃값도 비싸다고 들었으나 동리 사람들끼리 잘 나누어 먹었다. 강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셔서 우리가 드린 것을 공짜로 받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더 큰 복으로 갚아주시는 분, 참 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는다고 고백했다.
강 목사님은 6.25 전란 중 혈혈단신 입은 옷으로 월남해 서대문에서 방위군으로 입대하여 인천에서 제주도로 갔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차고 있던 허리띠를 팔아 요기를 했다. 광산에서 일했고, 열심히 성경학교 공부를 하면서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아 1957년 고령에서 침례교회를 개척해 훌륭한 목회를 하셨으며, 정월봉 사모님과 결혼 하신 후 포항교회, 부산교회, 영진교회를 거쳐 진해교회에서 70세에 은퇴하셨다.
현재 80세의 나이에도 남해도에서 50여명의 노인이 모이는 농촌교회 자원목회를 하고 계시다가 지난해 소천 되셨다. “나는 학벌도 교단 인맥도 없는데 교단의 큰 교회를 두루 목회하면서 충성하게 되었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받은 주님의 은혜는 송아지의 100배, 아니 1000배 이상이었다”고 간증 하셨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셨는데, 모두 훌륭하게 잘 자라 교회에서는 지체로서, 또 사회에서는 대학교수, 박사, 의사로 기여하고 있다. 특히 막내 김대열 군은 목사가 되어 진해교회의 후임 목사로 목회를 잘하고 있다.
무엇 하러 교회 왔심껴?
부산의 송월 타월 사장 박찬수 장로는 경북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사람으로 깊은 산촌 사람이다. 그곳 마을 사람들은 몇 가정 안되었으나 모두 조상귀신을 섬기며 대대로 살아왔다. 항아리에다 “조상귀신이 들었다”라고 써붙이고 섬겼다. 박찬수 씨의 모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면민 중에 더 열심히 섬겼다.
그러나 가정이 잘 되기는 커녕 계속 어려움만 생기고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대범하고 적극적인 박찬수씨의 모친은 어느 날 조상의 귀신 단지를 방망이로 박살냈다. “귀신이 있다면, 그만큼 열심히 섬겼으니, 무슨 효험이라도 있을 법한데 이게 도대체 뭐꼬? 여전히 이 꼴로 살게 되다니!”
가만히 생각한 끝에 일요일이 되어 자진해서 모친은 교회로 찾아갔다. 안내 당번 여 집사께서 이 여자를 보고 말을 건넸다. “무엇하러 교회 왔심껴?” “그마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으러 왔지요.” “아이고, 보통 복 갖고 예수님을 믿는 줄 아는교?” “뭐라카노! 나 같이 복 없는 년, 한번 예수 믿고 복 좀 방아 보입시더!”라고 말하면서 안내 집사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예배에 참석했다.
그날 이후 이 여인은 남달리 열심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아들과 딸도 신앙생활로 잘 키워 훗날 박찬수 장로가 되었고 송월타월 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하였고 송월타월 회사 직원은 청송 개일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한 가정이 예수님을 잘 믿고 복을 받으니 그 마을이 예수님을 믿고 같이 복을 받게 되었다.
모세처럼 2회 40일 금식기도
“장인식 선교사님, 어제 우리가 예배 본 임마누엘 교회 위닛(Winit)목사님과 떠나기 전에 조찬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시오.” 당시 그 교회는 태국 침례교단 100여 교회 중에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교인도 제일 많고, 건물도 서울침례교회와 매우 흡사했었다.
나는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일곱 가지를 지적해 주었는데, 그는 깜짝 놀라면서 자기의 교회 형편을 훤히 보는 듯 하신다면서 해답을 물어왔다. 첫째는, 목사님의 지도력의 미흡으로 미국에 가서 대학원 과정 공부와 둘째는, 목회자에게 ‘가시’가 있는데 기도, 특히 40일 금식 기도를 제안했다.
그는 내가 제안한 대로 부목사에게 교회를 임시로 넘기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40일 금식기도를 마쳤을 때쯤 지나는 길에 들러서 말씀을 전했는데, 여러 가지 대화 중에 향후 보호식과 목회에 대해 설명해 주고 헤어졌다.
그 다음 또 ABF(Asia Baptist Federation, 아시아침례교연맹) 회의를 마치고 귀국 길에 들렀다. 그는 영적 만족이 없어 두 번째 40일 금식기도를 마쳤는데, 교인들이 갑절로 늘어나 650명이 되었고 너무나 행복하게 목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개척교회에 300명을 보내고 ‘가시’ 집사는 가장 충성스런 집사가 되었는데 불러내어 특별히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알고 보니, 바로 자기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교회개척 주동 교인으로서 치마폭이 커서 아들을 목사로 앉혀 놓고 자기는 교인들 위에 왕후 노릇을 했던 것이다.
나는 개척하는 목회자에게 예수님처럼 40일 금식기도를 권했다. 손희익 목사, 이관희 목사, 김린석 목사, 홍준선 선교사 등 여러 목사가 잘 마쳤다. 꼭 40일이 아니더라도 “금식은 극기의 절정이며, 신앙 증진의 극치이다. 동서양 고금의 종교인들은 큰일을 하기 위해 영적 무장을 하거나 하나님께 고차원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금식을 했다”고 이상근 목사님은 설명했다.
종교개혁자 루터(Luther), 웨슬리(Wesley), 주석가 헨리(Matthew Henry), 신유부흥사 오스본(Osborne) 등 많은 훌륭한 주님의 종들은 금식기도를 실천했고 또 그것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홀(Franklin Hail)목사는 「원자력적인 하님의 능력」에서 “영혼의 구원과 인류의 병 고침과 영혼의 타고난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전 세계에 신앙부흥이 이뤄지는 하나의 방법으로 금식기도를 높이 제창했다.”
금식기도는 신속한 하나님의 응답과 기적을 낳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한명국 목사
BWA 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