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화 유적의 명승지인 경주 관광지도에는 아흔 아홉 칸짜리 고택(古宅)이 한 채 들어 있다. 알다시피 그 집은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이은 최 부자 가문의 사저(私邸)이다.
최씨 일가는 재산 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 면에서도 모범을 보인 명문가로 알려졌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와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최 부자는 만석을 추수했으나 3천석만 곡간에 들이고 3천석은 구제에 쓰고 나머지 3천여 석은 나그네 접대에 사용했다고 한다.
최씨 일가는 백리 안에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가훈을 세울 만큼 사회적 책임감을 중시했으며, 흉년에는 땅이나 전답을 사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들에게는 삼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고 살게 했으며, 찾아오는 나그네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독상을 차려주며 정성껏 접대했다.
마지막까지 부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최준 옹은 돈이나 양식을 꾸어주고 담보로 잡은 문서를 채무자들에게 돌려준 것으로도 잘 알려졌으며, 일본의 한반도 무단통치기간 동안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꾸준히 자금을 조달했고 남은 재산은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계림대학] 설립에 헌납하고 스스로 “부자”의 짐을 내려놓은 인물이다.
최 부자 댁의 사회적 기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찍이 이조 명종 때, 경주 부윤 이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남 유생들의 뜻을 모아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 아래에 서원을 짓고(1563) 김유신과 최치원과 설총의 영정(影幀)을 모시기도 했다.
이 “서악서원”은 김유신장군묘, 오릉(五陵), 돌 거북과 함께 지금까지도 선 자리에서 역사를 증언한다. 또한 그 가문에서 아흔아홉 칸 저택을 지은 것은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이같이 찾아오는 수많은 나그네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시대에도 여러 명의 부자가 있다.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해서 오늘의 “현대”를 일으킨 고 정주영 옹의 기업, 불확실성의 미래를 내다보며 반도체에 운명을 걸어 오늘의 “삼성”을 일으킨 고 이병철옹, 직물에 투자해서 기독교 정신으로 기업을 일으킨 최종현씨 일가의 “SK” 등등. 그들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떠받치는 큰 기둥 하나씩을 세우고 시각을 다투는 각박한 경쟁구도 속에서 각각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한 “부자의 길”을 가도록 기도하고 성원해야 할 일일 것이다
5만5천 한국교회 중에는 크고 부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작은 교회도 있다. 천둥 칠 때 들에 나가서 교회 하나씩을 주워 온 것이 아닐진대 교회마다 각각 주어진 사명과 스스로 세운 목표가 있을 것이다. 공연히 다른 교회 탓할 것이 아니라 “내 교회” 목양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큰 기업 큰 교회가 공연히 이루어진 것이랴! 각각 주어진 길로 충직하게 나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