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뮤지컬 가수로 활동하던 자매가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귀국해서 나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때 마침 모 모임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모임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인데 노목사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교부탁을 수락한 후 이 뮤지컬 가수를 그 모임장도 알만한 것 같기에 나의 집에 방문해서 상담 중이라고 하니까, 주저하지 않고 그 가수를 그 모임에서 특송을 하도록 부탁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일언지하에 “아니요”라고 했었다.
왜 내가 당황했는가? 전문인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전문인다운 과정이 필요하다. 일주일 뒤에 있을 30여명 모시는 작은 모임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래한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확신하기로 그 가수가 거기서 노래를 부르면 최소한의 예우는 어쩔 것 인가. 뻔한 일이다. 무료봉사다. 타고난 목청으로 늘 부르던 노래 한곡 빼면 될 걸 하는 생각이 순수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남이 이룬 공적은 쉽게 사용하려하면서 그 공적을 이루기 위해 투자(?)한 내역에 대해서는 모른다.
서울지방에 모신학교를 시작한다면서 학장이란분이 나에게 강의를 부탁하면서 학교사정이 어려우니 무료강의를 부탁하기에 일언지하에 점잖게 사양했었다. 공적에 대한 대가를 상업적으로 받자는 것이 아니고 양편의 지녀야할 윤리의식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학교의 그런 학장 할 바에는 아예 시발하지를 말라고. 성경도 말한다. 망대를 세우다가 중도에 그칠 예산이거든 안하는 것만 못하고. 대적을 물리치려거든 대적보다 더 큰 군사를 준비하라고 했던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눅14:28~32)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 우리가 값 치루지 않고 구원받았다. 그게 은혜다. 그러나 우리가 값 치루지 아니했을지언정 하나님은 대단한 값을 치루셨다.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상에서 피로 값을 치루셨다. 혈가(血價)를 치루셨다. 온 세상에 값 안치룬 가치는 없다. 모든 가치는 치룬 값의 결과이다. 가격은 가치의 상업거래상의 척도일 뿐, 가치는 그냥 지니고 있는 값이다. 값없이 구원받은 것은 인간 우리 편의 입장이고 하나님 편의 입장은 아니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
사람 사는 세상에 상부상조(相扶相助)하자고. 일시키는 사람은 당당히 노임을 주려하고 일하는 사람은 “뭘요”하는 자세만 갖춰있다면,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맥을 잃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공동체의 삶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