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주시는 주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이것을 통해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 무리에게 떡과 생선을 주시던 때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누가의 엠마오 사건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사건에 상응한다(눅 24:30). 요한은, 누가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만찬 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는 베드로가 큰 물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온 상황에서 그가 준비한 아침 식사에 제자들을 초대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예수께서 준비한 조반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거기에 이미 물고기와 떡이 있었기 때문에(v.9),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물고기 얼마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 속에 두 단계의 전승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한다: (1)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은 것과 (2) 공동체 식사. 누가의 이야기(눅 5:1-11)에는 물고기를 잡는 것만 다루어지는데, 누가는 나중에 부활의 예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전달한다(눅 24:30~35, 41~42).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는 예수의 지시와 베드로의 반응(21:10~11)은 두 단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이렇게 결합된 두 이야기는 선교의 중요성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예수와의 지속적인 연합과 교제가 성공적인 선교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조반을 먹는다”라는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하루의 중요한 식사를 가리키지만(예, 눅 11:37), 여기서는 아침식사를 가리킨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와 함께 먹은 저녁 식사(12:2; 13:4)가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아침 식사는 죽음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부활의 빛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나누는 새 시대를 위한 잔치였다. “조반을 먹어라”라는 명령법의 시제가 부정과거인 것도 바로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가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가리킨다. “당신이 누구냐”라는 질문은 예수의 교훈을 끝까지 거부한 그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한 질문(8:25)이며 유대교 당국자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침례요한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한 질문이다(1:19). 그것은 예수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던진 부정적 의도의 질문이었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부활의 예수를 체험적으로 알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확신은 그 사랑 받은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모든 제자들에게로 전해졌다.
저자는 부활현현 이야기를 식사 자리에서 주 예수를 알아보는 내용과 결합시킨다(21:9, 12~14). 식사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부활현현 이야기의 한 중요한 소재이다. 그것은 부활의 예수께서 식사 자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현현하셨다는 것 곧 그들은 식사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한다(눅 24:31, 35). 누가는 제자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수 자신이 생선을 잡수신 것을 언급한다(눅 24:43). 공생애의 예수가 식사 자리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것과 같이, 부활의 예수도 공동체의 식사 자리에서 그의 임재와 현존을 나타내셨다.
예수는 직접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신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21:13). 예수의 행위가 세 개의 동사를 통하여 표현된다: 예수는 가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신다. 이 식사의 주관자는 예수 자신이다. 떡을 가져다가 주는 장면은 유대인의 식사 자리에서 축복을 선언하는 주인의 활동을 가리킨다. 세 동사 모두 현재 시제로 나온다.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주님 자신이 오셔서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떡과 물고기는 오병이어 사건에서 축복을 받은 음식이다. 그 사건도 디베랴 바다 근처에서 일어났는데, 예수께서 떡을 잡고 축사하시며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다(6:11).
그 사건에는 분명히 초기 기독교인들이 실천했던 성례전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병이어 사건과는 달리, ‘축사하다’라는 동사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성례전적 의미를 포함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저자는 현재 시제의 동사들을 통하여 예수의 공생애에서 이루어졌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교제가 그의 부활 이후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또 나아가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이 현현 이야기들이 의도하는 중심적 교훈이며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새로운 형태로 함께 거하신다는 요한 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14:16~23). 이것은 또 독자들로 하여금 주 예수께서 베풀고 계시는 식사 자리에 지금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저자는 이 장면의 결론을 내리며 예수의 세 번째 현현을 강조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21:14). 저자는 이 사건을 제자들 편에서의 현현의 경험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소개문(21:1)에서는 부활의 주님이 그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주님의 활동으로 표현한 반면, 여기서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혹은 ‘보이신’ 사건으로 제시한다. 그 현현을 세 번째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한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제자들에게 현현한 것만을 계산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이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으로서 무효하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예수의 현현을 이해하는 요한의 독특한 입장을 반영한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하신 것은 예수의 승귀 이전의 현현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예수의 온전한 존재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예수는, 요한에 따르면, 그의 승귀가 완성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예수는 이제 그가 공생애에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계속해서 행하시고 재현하시는 분으로서 오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현현은 세 번째 현현이며 그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계속적으로 체험하게 될 부활하신 주님의 영원한 함께계심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 세 번째라는 언급은 또 다른 차원에서 그의 강조적인 표현을 반영한다. 유대교 문화에서 어떤 것을 세 번씩이나 말하는 것은 그것의 중대함을 나타낸다. 주 예수의 현현은 예수의 복음 곧 그의 존재와 그의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부활현현의 경험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예수의 복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부활현현의 경험은 제자들의 신앙과 신학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자들은 이 현현의 경험에 기초하여 부활신앙 곧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시며 그가 공생애에서 시작하셨던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계속해서 행하고 계신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부활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모든 것을 새로 이해하는 출발점과 중심점이 되었다.
따라서 요한은 부활하여 승귀하신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현현하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이것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과 제자들은 세 번에 걸친 현현의 경험을 통하여 이제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부활의 예수께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는 누가의 언급과 맥락을 같이한다(행 1:3).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 베드로와 개인적으로 대면하시면서 그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진행한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