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미안한 말이지만 은혜 받고자 하는 태도보다는 교단의 원로이자 학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연구적 심정으로 도대체 지금 부흥강사님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나 싶어서 자주 부흥회장에 참예하곤 한다.
세 부흥강사님들이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아니로되 본문자체를 나 나름대로 가상해서 택해 놓고 이들의 구호를 적용하기로 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8-29)
위의 본문은 율법과 복음을 갈라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율법의 자녀와 복음의 자녀를 명확히 구별해 주고 있다. 본문은 계집종의 자녀와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를 밝혀 주고 있다. 5장1절에는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명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자, 이런 본문을 놓고 세 부흥강사님들의 전매특허적인 구호를 보자. 내가 전매특허적 구호라 이름 한 것은 유독 그 강사님의 특유한 구호로서 부흥설교 기간 내에 아마 수 십 번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A 부흥사 曰. “이 말씀이 맞습니까?”
B 부흥사 曰. "이 말씀을 믿습니까?“
C 부흥사 曰. “이 말씀을 행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성도들은 “아멘”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응답한다.
이를 공자 논어에 나오는 지호락(知好樂) 표현을 빌어 재해석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논어에는 “도를 알기만하는 자는 좋아 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論語 옹야편).
먼저 “맞습니까?”라고 도전해 오는 것은 이 본문의 진리를 긍정 혹은 인지(認知)하느냐는 다짐이다. 우선 진리는 무엇인지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최초로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이게 논어의 知에 해당된다. 그러나 知에 그치면 뭣하나.
다음 “믿습니까?”라고 도전해 오는 것은 이 본문의 진리를 단순히 인지하는데 그치지 말고 좋아하느냐는 다짐이다. 즉 진리를 아는데 그치고 사랑하지 않으면 뭣하나? 즉 진리를 믿지(信) 아니하면 뭣하나. 진리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데 제 이 단계 태도이다. 이것이 논어의 好이다.
마지막으로 “행하겠습니까?”라고 도전해 오는 것은 진리를 인지하고 좋아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하지 않느냐는 도전이다. 이것이 논어의 樂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가령 이런 예를 들어 보자. :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 사과에 대하는 삼 단계 태도는 무엇인가?
제 1 단계 아, 이것이 사과구나(知, “맞습니까?”)
제 2 단계 나, 사과 좋아하는데(好, “믿습니까?”)
제 3 단계 그래서 내가 먹었지(樂, “행하겠습니까?”)
세 부흥사님들이 어느 날 어느 곳에서 함께 모여서 제각기 소리를 내고 종합 결론을 지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문제는 자기의 특허적 구호 하나만으로 집회가 성공적이 된다고 느끼는 착각이다. 이 착각들을 벗어나 진리를 전체적 입장에서 대하는 성도들이 모일 때 교회는 건강해질 것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