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해방, 그리고 자유를 돌이켜 생각나게 했던 8월도 지나갔지만 그 몇 주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 어떤 가치로도 바꿀 수 없는 것, 바로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70년 전 일제 36년의 식민통치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어 그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들의 눈으로 세계를 돌아보면 아직도 수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그들의 국가와 정치권력들에 의해서 폭정과 폭압, 폭력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가 승리하지 못하고 자유가 구속 당하고 있다. 소위 자유국가라고 말은 하지만 경제가치가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의 가치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영적 자유’이며 이것이 ‘참 자유’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는 이 세상 그 어떤 자유의 가치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 인 ‘참 자유’를 누리게 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구속의 보혈과 물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영적 자유’야말로 죄와 허물, 억압과 분노, 우리를 얽매는 모든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참 자유’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유혹 앞에서도 주님께서 주신 “영적자유”를 지켜나가야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 속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종교적 의식주의와 외식주의에 유혹되어 주님께서 주신 ‘참 자유’에서 ‘영적 노예’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구속하시지 않으시고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동기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무리들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주신 ‘참 자유’를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유대인들의 주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자유’를 거절하는 행위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칠십년 전엔 우리도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에 다시는 일제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에서 자유롭게 된 우리를 죄가 다시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지켜야하는 가치이다.
그래서 자유에는 언제나 위기가 뒤따른다. 지난 목함지뢰 사건에서 보듯이 사탄 또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그래서 13절에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고 했다. 오늘날 교계와 우리 사회 전반에 희생 없는 자유가 넘쳐서 그 자유가 방임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가 우리를 끌어가지 못하도록 영적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그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역설적/paradoxical이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데서 완성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내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부르셨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체적 존재다. 그러므로 신, 불신을 불문하고 욕망이 있고 그 욕망 때문에 상황과 형편에 따라 ‘내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적 갈등’으로부터 승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Walk in the Spirit”(킹제임스번역 16)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식을 성령의 지배 아래 드리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기의 인간성을 없이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 갈등을 이기고 ‘참자유’를 찾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참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그 자유는 오로지 사랑으로 종노릇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적 갈등의 상태에서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내적 갈등을 이기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뿐이다. Walk in the Spirit!
이정일 목사 / 청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