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니고 이제는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칭의의 개념을 성화의 개념과는 무관한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경험했던 과거적 구원의 사건으로만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신칭의의 개념에는 법정적인 체계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체계”(Relational System)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다”는 면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면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즉 “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과 그 분에 대한 나의 종됨(Servanthood)”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은 신자는 육신의 장막을 벗는 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신칭의를 단순히 예수 믿는 순간 얻게 되는 신분의 변화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변화된 신분을 가진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지속적으로 변화된 행동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까지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 거듭난 신자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터의 경우에는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Straw Epistle)이라 부르며 하찮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야고보서가 강조한 “행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함,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깔뱅도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강조하다보니, 믿음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결단”(Intentional and Positive Decision)이라는 개념이 희박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적이고도 실존적인 믿음”(Experiential and Existential Faith)의 개념이 희박하였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믿음 역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택함 받은 자들은) 그 은혜에 항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믿음을 무척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마음의 문 앞에서 노크하시는 예수님께 마음문을 여는 결단을 하고 그 분을 마음속으로 영접해 드리는 결단을 하는 것이다(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더 나아가서 믿음이란 단순히 지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Following after Jesus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결단”(눅 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든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가치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그 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마지막 대화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씩이나 자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하시고 베드로 개인에게 최후의 유언으로 명령하셨다: “나를 따르라”(요21:19);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이 명령은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이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Positively Respond)하는 것이요, 그 분께 나의 인격과 삶 전부를 “맡기는 것”(Trust)이요, 그 분만을 바라보며 그 분을 “따라가는 것”(Follow)이다. “이신칭의”를 강조했던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믿음의 “적극적인 면”을 간과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신칭의의 개념을 법정적이고 과거적인 의미로만 해석하고 관계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믿음과 행함, 믿음과 실천, 믿음과 삶은 심각한 괴리현상을 낳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받고 조롱당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 건져주신 “구주”(Savior)이심과 동시에 우리의 인격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주인이 되시는 “주님”(Lord)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통해서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그리스도”로서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의로운 삶,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Nachfolge Christi, Following after Christ)을 살아야 한다. 이 양자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사건과 부활 사건은 별개의 두 사건들이 아니라 연속된 하나의 사건이다. 이신칭의의 개념을 현재적이고 연속적인 성화와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넷째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부르짖었지만,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Continuity)과 함께 불연속성(Discontinuity) 혹은 차별성(Difference)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이다. 인간사회에서도 옛 약속과 새 약속 간에는 권위에 차이가 있다. 100년 전에 했던 약속과 10년 전에 한 약속이 있다면, 어느 약속이 더 우선적인 권위를 가질까? 당연히 10년 전에 한 약속이 100년 전에 했던 약속보다 더 우월적인 권위를 가진다.
/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교수 예사교회 협동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