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인해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하면 소통을 원활하게 할까 라는 질문가운데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 해법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가 소통되지 않는 인간의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소통을 회복하여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소통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소통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잠들어 있지 않은 이상 항상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까지도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통의 기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소통의 홍수 가운데 살면서도 이것은 통신과학이 가져다준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통신과학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업적은 놀랍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물류의 소통도 마음만 먹으면 어제 아침에 노르웨이 바다에서 잡힌 싱싱한 연어 고기를 오늘 저녁 밥상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대형마트에서는 수많은 상품들이 요란한 포장을 하고 “나를 사 가십시오.”라고 소비자들과 언어가 없는 대화로 우리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소통에는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대부분 언어와 활자로 소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 할 때 그 소통의 방법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히틀러의 선봉장이었던 ‘괴뷜스’의 말 한마디는 세상의 어떤 총 폭탄 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소통의 말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고대 그리스의 병사들이 오락으로 마차경기를 할 때 휘두른 채찍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찍이 말 잔등을 내려쳐지면 등가죽이 찢어져서 피가 튀었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합니까?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풍자, sarcasm”입니다. 잘못된 소통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통의 도구인 말과 문자를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우리는 말과 글의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소통은 기적인 동시에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가 동일하게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남과 북이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선거를 말합니다. 북한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하며 선거를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로 같은 말을 하지만 그 누구도 남북이 같은 의미를 말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너무 자주 집단 간에 소통의 단절로 고통을 당하며 심지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행정부와 입법부, 교수와 학생, 부모와 자녀, 목회자와 교회의 직분 자들, 서로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소통을 하려 하면 할수록 서로간의 거리만 확인 할뿐입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소통에 필요한 말과 문자를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말과 문자는 쉬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기에 ‘엽기’라는 말은 금기어였습니다. 너무 끔찍한 용어라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엽기’라는 말이 일반적인 풍자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전 4)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며 이웃과 소통하게 만들어 줍니다.
셋째, 소통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소통의 단절을 어떻게 회복시키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소통 방법과 매우 유사합니다. 인간들은 소통을 위해 상대가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소통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은혜의 소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헌신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통을 위해 편지를 쓰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소통을 위해 거룩한 편지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계시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소통 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거룩한 복음을 들고 나가 세상과도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정일 목사 / 청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