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희 가수가 불러서 큰 유행을 일으킨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애창한다.
어떤 모임에서 목사도 한 곡조 빼세요. 하고 요청하면 보라는 듯이 서슴지 않고 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하면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면서가수로 나가도 출세했을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 노래 가사를 말하면 이렇다 :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율법)은 알 수 없어요. 사랑(율법)으로 눈 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 준 사랑(율법)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율법)의 미로여” “사랑 자리에 ”율법“을 대치하고 ”진실“ 자리에 ”복음“을 대치해서 불러보면, 이게 유행가인지 복음송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목사가 유행가 한 곡조를 빼고 싶을 때(?) 유행 가사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려운데 복음으로 편작(編作)을 하면 내 마음도 꺼림이 없고 듣는 이도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사랑의 미로”를“율법의 미로”라는 제목으로 크게 바꾼 뒤에 가사를 정리하면 아주 복음적인 해석이 나온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의 표시인 율법 앞에서 꼭 그것을 지켜보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건만 인간이 유약해서 지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도무지 이 율법을 알 수가 없다니까. 지키면 좋을 이 율법을 지키려하면 매번 실패하니, 좋기도 한 것인데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벽을 오르다가 떨어지는 곰 같다니까. 그래서 우리 인간은 차라리 율법으로 인해 가슴에 멍이 들었다. 율법에 부딪치다가 가슴에 상처만 입었다. 그러다가 복음을 만났다. 이 복음이 율법으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거든. 그래서 복음 하나에 감격해서 울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 작은 가슴에 심어준 율법이여, 이젠 상처를 그만 주고 돌아가세요, 영원히. 율법 가지고 노니다보면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迷路)에 들어갈 뿐이니까. 율법 속에 있으면 헤매기 마련이다. 그래서 율법은 미로 였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사랑의 미로에서 율법의 미로를 찾는다. 그리고 복음 하나에 울고 웃는다. 벌써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도 이제야 또 알겠소. 율법으로 확인된 죄인이 복음으로 확인된 의인이 되었으니, 율법으로 인해 멍든 가슴이 복음으로 인해 시원한 가슴을 얻게 되었던 것이니 말이다.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아마 사랑한다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었던 어떤 실연한 연인의 한 맺힌 하소연이“상처 그만”일진대, 율법으로 인해 철저한 죄인 된 사람이 의인된 이상엔“율법 상처 그만”이라고 외치면 어떨까. 아니 그렇게 꼭 외쳐야 하지 않을까. 이게 복음 아닌가.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