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옷장에는 수 십 개의 넥타이가 걸려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넥타이수가 그렇게 되었다. 준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해서 거의 한 번씩 매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애호하는 넥타이가 있다. 무슨 넥타이를 맬까하고 넥타이 걸이를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딱 하나의 넥타이에 손이 간다. 바로 그 넥타이를 늘 자주 맨다.
왜 그런가? 그냥 좋기 때문이다. 매고 나서 거울을 바라본 나의 행장이 그 넥타이 때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넥타이는 천이 부드럽고 칼라풀한데다가 무슨 그림인지 모르나 디자인이 잘되어 있고 목에 걸치고 내리면 내 배꼽 위를 살짝 덮는 길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내가 말 한다. : “또 그 넥타이요?”라고.
그런데 아뿔싸 어떻게 한담? 이 넥타이의 수명이 다 한 것 같다. 우선 천이 맥이 없이 늘어지고 목에 매어 봐도 반듯하지 못해서 마치 피다가 떨어지려는 장미꽃 마지막 모습 같았다. 나도 이젠 이 넥타이와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버려야지! 그러나 어디에다 버린다냐?
이 넥타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설교할 때나 결혼식 주례할 때나 하여간 귀한 시간에 꼭 나의 목에 걸려 있어서 나도 좋고 그 넥타이 자신도 영화를 누렸음이 틀림없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목사님, 그 넥타이가 참 멋있는데요” 하는 말을 자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넥타이의 운명이 그게 아니야.
내가 막 버릴려고 하는 찰라 넥타이가 날보고 애원하듯 그 특유의 눈으로 쏘아보면서 말해 온다. : “목사님, 이대로 이별하기요. 다시 만날 방도는 없을까요. 나는 목사님을 떠나기가 싫은데요.”
그 순간 나에겐 전광석화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넥타이를 나의 허리띠로 쓰자고. 비로소 말했다. “야, 넥타이, 그대를 이젠 나의 허리띠로 쓰고 싶은데 어때?” 넥타이는 즉각적으로 OK라고 응답하면서 너풀너풀 춤을 추고 있었다.
목에 걸려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를 받던 넥타이가 이젠 아무 사람의 눈에도 뵈지 않은 채 나의 바지의 귀에 꿰매여 숨어 지내는 허리띠로 추락(墜落)했겠다. 암, 그것은 추락이야! 암, 그것은 비극이야. 이렇게 중얼 거리고 있는데 넥타이가 나의 허리를 꾹 찌르면서 나의 귀에만 들리게 소곤거린다. : “목사님, 그런 생각마시라오. 나는 추락한 것이 아니라 비하(卑下, humiliation)한 겁니다.”
순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걸 어찌 넥타이의 추락이라 하랴! 그럼, 그렇지. 그것은 넥타이 스스로 취한 비하야.
그 비하의 대표적 사건은 예수사건이니, 그는 몸소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셨으니 곧 성육(成肉)하신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추락한 것이 아니라 비하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권 목사 목에 걸려 가는 곳마다 영화를 받던 그 넥타이가 지금은 권사목사의 허리춤에 숨어 있는 허리띠로 내려앉고 서도 추락이 아닌 비하로 여기니 고맙다 넥타이여. 성육신 예수님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