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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직업이 없다는 교훈

하늘붓 가는데로-71

어떤 예술가가 전하는 말이 내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았다. 그것은 “예술가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일반인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고백이었다. 직업이 없다는 그 예술가의 뒷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들에겐 직업이 없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예술은 예(藝) 자체를 사랑하는 행위다. 예술가는 예술을 팔자고 출산(出産)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무용이든 간에 그 자체들을 사랑해서 이것 끝나고 나면 누가 돈 주겠거니 하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화가 이중섭 화가인들 그렇지 않았겠나. 그가 죽은 뒤, 그의 그림값이 나간 것은 화가와는 별 문제였었다.


순수한 예술정신!
그것을 사랑해서 그것을 하다보니 밥도 옷도 생긴 것이다. 그것이 직업으로 보인 것은 순전히 사람들의 부산물적 착각이다. 적어도 예술가의 철학은 그렇지 않은가 싶어 주제 넘게 내가 정리해 주는지도 모른다.
가령 산 속 숲에서 날아가는 백조가 아름다워 자기를 잊은 채 즐기고 있는 감미자(甘味者)에게 어떤 장난꾸러기가 찾아와서 백조가 날아가는 횟수를 잘 헤아려 보라 하고 그것을 한 번 볼 때마다 돈을 10만원 지불하겠다 했더니 이 감미자는 한 번 두 번 뜸하게 있다가 세 번 그리고 내 번째 백조가 날아가기를 학수고대하게 되었다는데 이때는 날아가는 백조의 아름다움을 감당하는 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횟수를 세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렸고 그때는 또 따분하고 지루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사에게는 직업이 없다는 목회현장으로 재빨리 무대를 옮겨 보았다 목양은 직업이 아니다. 소위 성직(聖職)이란 말도 정확히는 잘못된 표현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깨달은 후에 마음에 지닌 것은 모든 이에게 “복음은 결코 율법이 아니올시다”라고 전해야 한다는 부채감(負債感)이었다(롬1:14~15).
그 예술가의 뒤풀이가 계속되었다. 정치인이 예술가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 정치인은 또 기업가를 일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그렇게 해서 모든 예술가의 예술을 만인이 즐기는 것이 상부상조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예술가가 돈 생각 없이 오직 예술만 하게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작품을 나올까?
교회 성도는 목회자의 생활을 100% 책임지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오직 목회일념만 갖도록 목사의 안방식구들이 따뜻하고 쌀독에 쌀이 가득하고 커피값이 두둑하게 통장을 채워 줘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언필칭 반대가 나올 것이다. “목회자는 배고파야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어림없는 소리다. 사도 바울도 선교를 돕는 교인들에게 뜨겁게 감사했었다(고후9).
어떤 교회의 못 되 먹은 재무가 기왕에 줄 목사의 월 생활비를 고무줄식 공급을 했다는 것이다. 돈줄을 쥐고 늦게 주었다가 일찍 주었다가 하는 식으로 어느 달에는 보름이 지났는데 생활비 지불을 않고 자기는 갑(甲)의 자리를 취하고 목사 사모가 재무에게 돈 좀 달라고 을(乙)의 위치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은 천하에 몹쓸 짓이다. 목수가 직업이 없다는 것은 세상의 예술가가 직업이 없다는 고백만도 못한 것인가? 직업 없이 예술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예술을 즐기는 자의 횡포가 아니고 뭔가? 참된 성도는 무직업 목사의 목격(牧格)을 살려 주는 자일 것이다.

 / 水流(수류) 권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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