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목양실 벽에 ‘평화의 기도’ 목판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웬만한 교회의 주보에는 실리고 교회 행사 유인물에도 자주 실리는 것이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이다. 사실 이 기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말도 있으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전문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기도를 언제 올리는 것이 신앙적일까? 언제 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일까? 평화의 기도를 시도 때도 없이 올리면 될 것인데 뭘 그렇게 기도 올리는 시점을 따지는가? 그렇다. 그러나 따질 이유가 있다. 이 기도는 구원받기 이전과 구원받은 이 후로 시점을 명백히 가려서 해야 하나. 구원받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올리라고 하면 모두 좌절, 절망, 실망, 양심 가책을 느끼며 그리고 아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무서워하거나 포기하려든다.
왜냐하면 이 기도 내용대로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자기의 부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가령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어찌하든지 자기가 위로 받기를 원한다. 또 가령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라고 하는데 사람은 일단 자기가 사랑 받기를 원한다. 보통 사람들이 이기주의적이 되지 말고 이타주의가 되라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원 받기 전에 이 기도를 하라? 어림도 없다. 왜냐하면 구원 받기 전의 이 기도의 내용을 실천하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율법이다. 그것은 결코 은혜복음이 못 되는 기도인 것이다.
그럼 이 기도는 언제 해야 되는가? 아니 이 기도의 자연스러움은 언제인가? 율법을 저 멀리 떠나 보내고 은혜복음으로 들어 온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성도가 될 때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0~11)
구원받기 이전의 평화의 기도는 육체의 모양내기 주문이다. 그 기도 내용은 고차원적인 율법이다. 그것은 10계명이다. 그것은 신판 산상보훈이다. 구원받기 이전의 그 기도는 육체를 심는 것이니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평화의 기도 내용은 훌륭한 것이로되 구원받기 이전에 올려야 하는 기도라면 율법이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것이 마땅히 올려야 할 기도이며 또 복음 생활인 것이다. 제발 이 기도의 사용 시점을 다시 한 번 점검했으면 하건만 워낙 오랜 역사 동안 관습기도로 내려오던 것이라 그렇게도 시점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딱한 일이로다. 율법과 복음을 갈라 놓는 사람에게는 물과 불의 차이처럼 확연해지는데 말이다.
/ 권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