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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레븐 실레븐”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창씨 개명 니시하라 히대하루

사촌 누나들이 왜놈 말 이찌, , , , , 로구, 시찌, 하치, , 를 입학할 때 잘 외워야 하고 니시하라 이대하루 상”(西原泳春)하면 똑바로 서서 차려 자세로 하이라고 대답해야 입학한다고 해서 시킨대로 잘 연습하여 19449월 초 도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 간 뭘 배웠는지 모르나 연필 깎는 소리냈다고 옷을 전부 벗겨 팬티만 입히고 눈덮인 운동장을 5바퀴 안 돌았다고 갖은 수욕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일본국가 기미가요는 잊어버렸으나 지금껏 기억하는 노래는 하루가 끼다, 하낭아 사꾸일 뿐이다. 왜놈이 가르쳐준 노래대로 1년 후에 삼천리 강산에 해방의 봄이 왔고 꽃이 피었다.

 

양코배기 글 투레븐 실레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또 양코배기 글을 세상에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때 그놈의 싫고도 못 되먹은 외놈 말과 글 배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중학교에선 서양 놈의 글을 가르치지 않는가? 더러워서 못살겠다! “너희들, 지난 시간에 배운 거 누가 해볼 사람 손들어!” 라고 영어 선생이 물었다. 모두 조용하자 “B반에 급장은 어느 놈이고 먼저 일어서라해서 일어섰더니 1-20까지 외워보라 했다.

, , 쓰리, ···, 일레븐, 투레븐, 실레븐이때 비웃음 소리에 손으로 책상치는 소리, 발을 꿀려서 바닥진동소리로 야단이 났다. 영어선생은 소리쳐 조용히 한 뒤 “B반에 급장이란 놈이 저 꼴이니 다른 놈들이야 허 참 껄껄···.” 그 날 이후로 반장인 나의 별명은 투레븐 실레븐!”이 됐다.

 

“A동사는 뭡니꺼?”

그 놈의 양코배기 글공부가 신통찮아 대구의 일류고등학교에 못 들어가고 이차시험에 영남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야 이놈들아, 아무리 중학교 3년간 6·25전쟁 중이라 공부를 못 했어도 세상에 B동사도 모르는 놈이 고등학교에 들어왔냐!” 소리쳤다. 그 때 생각해 보니 B동사가 있다면 먼저 A동사는 뭔가 싶어서 선생님, 그러면 A동사는 뭡니까?” 했더니 친구들은 웃고 수군거리고 책상을 치기도 했다. 선생은 발을 굴리면서 소리 질렀다. “아이코, 이봐라. A동사가 뭐냐고? 미치고 환장한다. 저 놈 어디서 왔노?” 친구들은 울릉도 오징어 아입니꺼. 아이다. 호박엿이 축 늘어졌다!” 그 날부터 별명은 어이 A동사!”로 놀림을 받았다.

 

소야규 명분법

여름방학 두달 동안 소야규 영문법이란 일본사람이 쓰고 번역된 책을 완독하고 싹 외워버렸다.

개교하여 영어시간에 이 놈들 방학 동안에 놀지 않고 공부했는지 시험 칠 준비해라.”학생들은 안 가르치고 무슨 시험을 치느냐고 수근거렸다. 문제는 문장의 5형식과 따른 문장 하나씩 쓰는 것이었다.

다음 영어시간에 선생은 한명국이가 어딨노 일어서라.”했다. 내가 일어섰더니 3반에 100점 맞은 학생은 한군 하나이니 박수를 치라.”고 했다.

그날 이후 A동사 별명은 싹 사라졌다. 경북중학교 1등 졸업하고 입학시험에 1등으로 입학한 기우황이가 한 반 학생인데 98점이라 했다. 그 후에 기우황이는 경북대학교 교수로 학장, 총장을 지냈다고 들었다.

 

양공주와 코피

대구 덕산동교회에 로니 보드맨(Rony Boardman)이란 미군이 주일날 나오는데 김기석 목사님의 아들 김태림은 능숙하게 영어대화를 잘하더니 고졸 후에 미국 유학을 간다고 해서 알아보니 대구중학교 자리에 미8군이 있었는데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미군부대에 통행증을 받아서 드나든다고 해서 한 번은 따라갔다.

미군 군종감 알렉산더(Alexander)대령이 미국과 한국인 50여명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공부 끝에 질문시간에 용기를 내어 손을 들어 평생 처음 질문을 했는데 두 번이나 못 알아듣자 바로 앞에 앉은 양공주학생, 내 한테 한국말로 해보래이해서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입니까?”했더니 양공주가 뭐라고 살랑거리니깐 당장 알아듣고 대답했는데 못 알아 듣는 내게 양공주가 친절히 알려줬다. 그 날 저녁 나오면서 세상에 내 말은 못 알아듣고 양공주의 말을 알아듣다니 분통이 터진 김에 입구에 놔둔 전도 팸플릿을 몇 개 들고 나와 밤을 새가며 공부했더니 그 새벽에 코피가 처음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일기장에 코피를 발라 놓고 처음 흘린 코피를 잊지 말라.”고 썼다. 그 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전을 외워갔고 2학년 때 “Digest”강좌에 나가기도 했다.

 

Dr. A. W. Yocum 통역

우리 형제9남매로 농사지어 사는 가정 형편이 안 되어 정치가가 되기 원하던 서울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를 못가고 3년간 농사일도 돕고 쌀가게도 돌보다 폐결핵으로 외삼촌 전석봉 병원에서 조수 일을 배우면서 도동교회에 나갔다. 마침 부산 침례병원장 요컴 박사가 은퇴 후 귀국하지 않고 울릉도 도동교회에 병원을 개설하려고 입도해 개업환영예배를 드리는데 함께 따라 들어온 조정도 집사도 통역을 못하겠다고 하니 김석규 목사에게 제가 손을 들어 허락받고 나가서 15분간 통역을 했는데 평생 처음 통역이라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무더운 여름이라 등골에 땀이 흐르고 얼굴의 땀 닦으러 밖으로 나와 처음 통역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인연으로 귀국 후 저가 보낸 편지를 받고 장학금을 보내줘서 신학교 예과에 입학하니 나의 요구로 한남대학교에 편입하게 됐다.

영문과 전과와 한미전도대회

신학교에서 편입한 학생들은 성문과에 입학했으나 나는 2학년 진학할 때 아무도 어려워서 안가는 영어영문학과로 전과한 것은 기도하는 중에 앞으로 세계적 일을 하려면 이놈의 영어를 못하면 안되겠구나!’하는 감동으로였다.

그 어려운 세익스피어 작품공부와 로미오와 줄리엣 영어 연극도 하였다.

1970년 이후 한미전도대회와 여타의 국내의 통역을 수백여회 하게 된 것도 영문과를 나온 때문이었다.

특히 James Hogan 박사 외에 수많은 미국 친구들을 만난 좋은 복음의 교제였다.

 

BWA 1990 서울 대회 유치 후

안대벽 목사의 소천으로 1981년 제2부총회장으로 한국총회를 대신해 상임위원이 됐다.

19847월 서독 베를린의 Panta Hotel에서 열린 BWA 상임위에 총회장으로 참석해 조해도 총무의 간증, 김장환 목사의 설교 후, 본인은 유치연설을 하여 만장일치로 500여명 상임위원의 박수를 받았고, BWA 1990서울대회 성료 이후 1997년엔 APBF부회장으로 5년 봉사하면서 이어서 2005BWA부회장으로 선출되어 5년간 세계를 다니며 섬겼다.

2010년 이후 지금까지 33년간 136회나 국제회의와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게 됐다.


한명국 목사 /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