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핵가족화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경제사정도 여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부모님도 짐으로 여기고 돌보지 않고 방임하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낯선 곳에 버리고 사라지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신자 불신자를 떠나 자녀의 근본적인 도리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향한 봉사의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기부모님부터 잘 섬겨야 한다. 부모님 시부모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5:16)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식에게 땅에서 장수하며 복을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지 않을 지라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오늘 날 세상은 도리도 저버리는 세상이 되어간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 볼 때는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도록 자녀들이 자라면서 왠지 점점 멀게 느껴지는 거리감은 어쩔 수가 없다.
“아들이 어릴 때는 1촌 / 아들이 대학가면 4촌 / 아들이 군대 가면 8촌 / 아들이 장가가면 사돈의 8촌 / 아들이 자식을 낳으면 동포 / 아들이 이민을 가면 해외 동포”라는 유머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고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공경하며 손주들의 재롱을 보여 드리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기도로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야말로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귀한 가치를 가진 행복한 가정이다.
어느 노부부는 힘들게 현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아들을 대학공부를 시켜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여 맞벌이를 하며 집도 사고 돈도 모르며 잘 사는 모습만 보아도 흐뭇했다. 부모님도 각자 자기 일을 하며 아들 도움 없이도 따로 잘 살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져 회복하지 못 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됐다.
그러다가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장남 집으로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간호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고 손수들을 돌보며 며느리가 할 일을 다 했다.
젊은 아들 며느리는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기는 했겠지만 불만이 쌓인 며느리는 남편과 싸움이 잦아지고 급기야는 시부모님이 집을 나가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요양 병원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따로 살기로 했는데 평생을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건만 늙고 병들어서 자식들에게 외면당할 때 배신감과 섭섭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늙으면 병들어 서럽고 돈 없어 서럽고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외로워서 서럽다고 한다. 부모들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거동이 불편하도록 늙고 병들면 요양 병원으로 가서 살아야 할 생각을 해야 하지만 사람은 늙을수록 가족이 그리운 법이다. 함께 어울리지 못해도 자손들이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 들으며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살고 싶은 것이다.
아들도 며느리도 사람은 누구나 다 늙고 부모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 것이므로 힘들어도 가능하면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고 자주 찾아뵙고 전화 드리고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며 노년을 외롭지 않게 살다가 천국 가시도록 하는 것이 자녀 할 수 있는 도리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윤리 도덕적으로도 비판 받지 않도록 살아야한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교회에서도 모범적이며 인정받는 신자라도 자신의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도 인정받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고 또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했다. 그런데 너희는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하여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현대인의 성경 마가복음 7:10~12)고 하시면서 종교적인 전통을 핑계로 말씀을 폐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하는 세대를 지적하셨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시간과 물질을 헌신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부모님께 소홀히 하면서 교회를 섬기느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정당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어렵게 두 아들을 키우는 목사님 부부가 있었다. 아들들이 대학을 다닐 때 한 학기를 마치고 다음 학기 등록을 하려면 항상 등록비가 모자라 어머니는 아들에게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비 절반을 벌어야 등록을 해준다고 등을 밀어 돈 벌러 보냈다. 그 때는 국가 장학금제도도 없는 때라 등록금을 준비하지 못하면 등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쪽같은 아들이지만 공사장으로 회사로 일하러가라고 쫓아 보냈다고 한다.
두 아들은 방학이 되어도 친구들과 제대로 놀러 한번 가보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첫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하나님께 십일조와 부모님께 생활비에 보태라고 돈을 드리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들이 태어나고 돈 쓸데가 많지만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와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그르지 않고 꼬박 꼬박 드린다고 한다.
그러고도 아버지 집에 목돈 들어갈 일이 있으면 아버지와 두 아들이 3분의1씩 똑같이 나눠서 분담을 한다고 한다. 그런 두 아들의 효성에 며느리들도 다 동의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는데 불평 없이 잘하고 있어 자녀들이 너무 고맙다고 한다.
“잘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나를 낳았어요.” “내게 해준 게 뭐있어요.”하고 부모님의 가슴에 못 박는 자식도 많은데 효성스러운 아들들이다.
십계명 중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인 것을 보면 하나님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만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님 섬기는 것도 신앙생활이요, 사명이므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잘 섬겨야한다. ‘행복’을 사전적 의미로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만족과 기쁨 흐뭇함을 느끼려면 마음이 편해야하는데 부모님을 돌보지 않거나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면 그것은 위장 행복이지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 섬기는 것처럼 부모님을 섬기면 편안한 마음에 행복도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