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저 밑바닥에 공의(公義)라는 것이 깔려 있어서 상벌도 있지만 마침내 표면에는 사랑의 관계다. 사랑에는 사랑하기에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게 된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담은 연서(戀書, Love Letter)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학문의 정단의 상아탑에서 골머리 앓아 가면서 짜내고 끊고 붙이고 한 논문(論文)을 원하지 않으신다.
고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연애편지를 영문으로 작성해 보라는 숙제를 내고 그것을 번역한 것을 여기에 실어본다.
“나는 밤낮으로 당신을 생각합니다.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 모습이 보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당신의 얼굴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가로수에서 떨어진 노란 은행잎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어젯밤 다시 전화했지만 당신은 집에 없었습니다. 사흘이나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이틀이 지나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내 가슴 속에 고통을 느낍니다. - 수강생의 글”
이 숙제 글을 읽고 장영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지들에는 학생들이 어려운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즉 장황하게 길고 현학적이고 또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 편지에 담긴 순수하고 깨끗한 감정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의 ‘톤’은 다음과 같은 위인이나 위대한 작가들의 연애 편지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음은 유명한 작가들의 연애편지이다.
“나는 단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단 하룻밤도 당신을 포옹하지 않고 잠든 적이 없습니다. 군대의 선두에서 지휘할 때에도, 중대를 사열하고 있을 때에도, 내 사랑 조세핀은 내 가슴 속에 홀로 서서 내 생각을 독차지하고 내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난 열한 시 삼십 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줄 곧 바보처럼 안락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보입니다. 나는 오늘 두 사람에게나 말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굳어서 그들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닌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조이스.
그 책명은 기억에 남지 않으나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여체(旅體)에 관해 거의 환상적으로 묘사했기에 혹자는 어떤 잡가(雜家)가 쓰고 푸쉬킨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 아니냐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그 라인에는 작가적 기질 따위는 선반에 올려놓고 원색적으로 기록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잡담 같은 필을 쓰는 것 같아서 재빨리 나의 필로 하여금 제자리에 오라고 독촉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서이다. 거기에 딱딱한 논문이 개입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학위 논문을 제시하려고 하는가? 왜 목사의 설교가 듣는 즉시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고 집에 가서 생각하니 ‘아 그렇구나!’하게 하는지, 예수님의 교훈은 모두 연서로 되어 있다. 사도들의 서신도 사랑의 권고로 되어 있기 않던가?
/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