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는 원래 일본의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서 처음에는 조선에 거류(居留)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들여왔으나,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조선인에게도 참배, 즉 태양신을 상징하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遙拜)하는 행위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다가 조직적 반발에 부딪혀 잠시 멈칫하더니, 1935년을 전후해서는 총독부가 앞장서서 학교뿐 아니라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교계는 찬·반 의견이 엇갈려 기독교가 양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을 합병할 목적으로 ‘황민화(皇民化) 운동’을 시작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을 선양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의 언론인, 지식인, 교육자, 종교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제는 언론사를 폐간하고, 교회와 학교는 폐교하고, 외국인은 추방하고, 내국인은 투옥했다. 일제는 1945년 6월까지 조선 땅에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 곳을 세웠는데 총독부는 이것도 부족해서 각 급 학교에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집집마다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게 했다.
신사참배와 침례교회
침례교회의 전신 “동아기독교”의 초대 감목(監牧)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공교육기관에는 자녀들을 보내지 말도록 지도했다. 일본은 펜윅 선교사의 사후인 1944년 5월에 “동아기독교” 교단을 해체하고 32명의 목사들을 불경죄로 투옥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와 맞서 싸웠지만 교단적으로 신사참배와 이와 관련해서 일본 주도의 공교육까지 거부한 교파는 침례교회 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스쿠니 신사(Yasukuni shrine, 靖國神社) 문제
신사참배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도쿄에 있는 일본 최대의 ‘야스쿠니 신사’이다. 일본은 이곳에 태평양 전쟁에 책임이 있는 일본의 고위급 전범들과 병사 246만 명의 위패와 징병과 징용 등으로 일본에 끌려가 희생된 조선인의 위패 21,000기와 대만인 28,000기를 합사(合祀) 하고 있다.
원수끼리도 유해는 연고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국제적 관례인데 일본은 자의든 타의든 자기 나라가 시작한 전쟁에서 희생된 외국인의 유해를 반세기 넘게 자기나라에 억류하고 있다. 일본 땅에 하루 속히 상식과 도리를 존중하는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