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가 구리 료헤이가 1989 년에 발표한 “우동 한 그릇”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972년 섣달 그믐날 저녁, 도쿄의 “북해정”이라는 음식점에 한 어머니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물론 된다고 대답하고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 세 개를 놓아 줬다. 그 후 그들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그 식당에 가서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고 주인은 그때마다 몰래 소바 1인분 반을 더 올려줬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에는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식당 주인은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부인의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죽으면서 여덟 명이 다치고 회사에도 큰 손해를 입혀서 그 가족은 십여 년 동안 일해서 그 날 빚을 다 갚고, 기념으로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북해정” 식당에는 그 가족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식당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그 가족이 앉았던 자리에는 “예약석” 팻말을 붙여서 비워놓고 그 가족의 사연을 알고 있는 단골손님들과 함께 그 가족을 기다렸다. 그런데 십 수 년이 지난 어느 해 섣달 그믐날 같은 시간에 그 어머니와 양복을 잘 차려입은 두 아들이 식당에 나타나서 피차 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동 세 그릇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그들이 “북해정”에 오지 못한 것은 시가 현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고, 그동안 큰 아들은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가 됐고 작은 아들도 사회에 진출했다고 한다.
십여 년 동안 애타게 그 가족을 기다려온 단골손님들의 기쁨도 대단했다. 우동 값이 올라서 한 그릇에 200엔이 됐지만 주인은 처음 그들이 와서 한 그릇을 세 사람이 나눠 먹을 때의 값으로 150엔이라고 하고 450엔을 받았다.
갑자기 “우동 한 그릇”이 생각난 것은 일전에 있었던 언짢은 일 때문이다. 딸네 식구들과 함께 유성의 수통골 부근에 있는 한 음식점에 갔는데 예약이 필요없다고 말하기에 그냥 갔더니 여섯 사람이 세 사람씩 따로 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주인이 와서 한 상에 갈비 3인분씩을 주문하지 않으면 상을 차려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좌판에 앉아서 십 원짜리 국수도 사먹어 보고,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이렇다하는 레스토랑과 호텔에 식당에도 가보았지만 메뉴를 제한하고 그만큼 주문하지 않으면 상을 차려 줄 수 없다고 하는 식당은 난생 처음 봤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불쾌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교회 생각이 났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주차 요원의 메뉴, 안내자의 메뉴, 설교자의 메뉴가 고객(?)에게 강요된다. 더 좀 사려 깊어야 하겠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제일 값싼 돈부리(고기덮밥) 하나를 주문하는 손님도 말고기 육회에 고급 사케를 주문하는 고객과 꼭 같이 대우하는 것이 일본인의 직업의식이다. 그것은 고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친절이건만 우리에는 그것마저 부족해보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