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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說敎)에 대하여(3)

도한호 목사의 목회와 상식-144

설교에 대해서 직 간접적으로 여러 번 글을 올린 바 있으나 설교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반성과 교정의 필요성을 느낀다. 설교의 ‘말씀 說’ 자는 ‘말씀 言’ 변에 兄이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옥편은 이 글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사람이 서서 가르치는 모양이라고 하지만, ‘형제 兄’ 자 위에 놓인 모자를 모양대로 ‘여덟 팔’ 자로 풀이하면 설교는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한다는 의미가 된다.
형님이 말을 하든지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씀을 하든지 간에, 설교자는 청중(신자와 시청자)을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말과 태도를 정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가르칠 敎’는 회초리 네 개와 ‘아들 子’와 ‘글월 文’ 자로 구성된 글자이다. 자녀교육은 학문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엄해야 하며 필요 시 매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교학(homiletics)은 ‘따라 말한다’는 의미의 homily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dictate, 즉 받아 적어서 백성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가 네게 일러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렘30:2).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성경에서 이끌어내야지(exegesis) 성경 밖에 것을 집어넣어서는(eisegesis) 안 된다. 예화를 사용하거나 본문을 해석 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무릇 목회자는 잡담, 농담, 자랑, 허세를 빼고 말씀만을 전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사 또는 목회라고 할 때의 ‘기를 牧’ 자는 ‘소 牛’ 변에 ‘글월 文’ 자로 된 글자이니 목사는 소에게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소는 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설혹 듣는다고 해도 뜻을 깨닫지 못하니 목사의 설교는 ‘소 귀에 경 읽기, 즉 우이독경(牛耳讀經)’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도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친다는 강의(講義)의 ‘외울 講’ 자에는 보는 바와 같이 세 번씩 세 번씩 여섯이 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그것을 다시 반복하라는 ’다시 再‘가 들어 있으니 열두 번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도 어렵거니와 가르침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어렵다. 더구나, 소에게는 뿔이 나 있으니 뜨는 소 한 마리도 다루기 어려운데 적게는 여덟 마리부터 많게는 수천 마리의 소를 모아놓고 경을 읽어야 하니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해결책을 주셨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성령]으로 되느니라”(슥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