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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26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주의와 새 관점주의자들의 관점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그 새로운 대안으로써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그 예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에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관점에서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Ⅲ.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신론적 측면의 구원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쉐마를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이 구절은 유대 사상의 토대였는데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에 놓인 기초 위에 건축했다. 바울이 말하듯이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이다.  구약성경에는 창조주·하나님의 주권·유일성·자비하심이 나타났고,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흐른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작정하신 일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중심되심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자라는 사실에 나타나 있다.
바울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성이 중요한 주제를 이룬다. 즉 하나님이 바울신학의 근본적인 전제요, 그의 신학 작업의 출발점이요 그의 모든 저작의 주제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고백(고전 8:4~6; 엡 4:6; 딤전 2:5)에서 바울은 유대 전통을 따른다. 이 한 분 하나님은 또한 땅의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시는(엡 3:14~15)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구약 성경으로 양육 받은 유대인이며 하나님을 유일하신 만유의 주님으로 여긴다.


바울서신에는 대개의 경우 하나님이 바울의 사역을 정당화시켜주는 요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서두에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갈 1:1)이라고 거의 틀에 박힌듯 한 말로 시작한다. 즉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설명하거나 변호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어려서부터 교육받고 그의 생애 내내 줄곧 지켜온 믿음이었기 때문이다(고후 1:1; 엡 1:1; 골 1:1; 딤후 1:1). 본 장에서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신론적인 구원론을 살펴보되 먼저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갈라디아서에 사도 바울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1.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갈 1:1-4; 4:1-7)
신구약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계시한다. 신구약성경에서 한 분으로 묘사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분은 셋이면서 하나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했다. 하지만, 한 분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거기에는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아들되시는 하나님, 성령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 각자는 하나이면서 셋의 인격을 갖는다.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모든 활동을 보여준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역사요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배제하고 갈라디아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1)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모세의 고별설교인 신명기 32장 6절에서 처음으로 ‘너의 아버지’라고 표현돼 있다: “여호와… 그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하며(막 14:36) 마태복음에서는 ‘너의 아버지(마 6:4),’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한다.
누가복음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게 ‘너희 아버지,’ ‘내 아버지(눅 22:29)’라고 하며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한데 대해 몹시 자극됐음을 나타낸다(요 5:17-18).


바울도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라고 해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인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고 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선포했다(고전 8:6). 그런데 서신 서에서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모두는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연합되는 한 형제자매, 즉 주 예수와의 일체적 하나임을 강조한다(엡 1:17; 벧전 1:3).
마리아네 톰슨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강조는 예수님의 사명, 회개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유업이 있으리라는 약속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 톰슨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세 가지 주제를 강조한다.


첫째,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가족 또는 일가의 근본 또는 기원이며 그의 자녀들에게 유업을 제공한다. 둘째,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보호하고 필요를 공급한다. 셋째, 아버지는 순종과 존귀가 합당하게 주어지는 권위의 인물이다.
예수는 독특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공관복음에서 ‘아버지’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권위와 선하심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요한복음의 중심이다.
제임스 던은 신학적으로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지중해 세계의 모든 종교적인 전통 안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고 또한 하나님과 그에 의해 낳아진 이들 사이에 혈연관계가 동등함을 나타냈고, 그래서 수반된 혈연에 대한 가족결속과 의무에 대한 모든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특별한 필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아버지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라는 가장 높은 권위는 바울에게는 사도로서 권한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절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두 이름의 결합을 통해 아버지는 그 권한의 중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권한의 근원임을 표현했다. 여기서 바울의 주요한 관심은 그의 사도적인 권한의 중재가 하늘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스는 예수님이 자신이 가진 하나님과의 경험의 견지에서 ‘아버지’라는 용어를 독특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예수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호칭으로 나타난 ‘아바’라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과 가진 관계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이라 했다.


‘아바’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부르는 호칭이나 일상적인 ‘아빠’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떤 친밀함과 떼어 놀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예레미야스는 복음서들에서 ‘아버지’(Father) 또는 ‘그 아버지’(the Father)라는 말이 사용된 모든 경우에 그 밑바탕에는 ‘아바’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바’에 관한 예수님의 사용이 예수님의 편에서 친밀한 아들됨의 의미를 아마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는 예레미야스의 주장은 여전히 정당하다.
이는 친밀한 가족 관계의 일상적인 용어에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예레미야스는 마태복음 11장 27절을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는 것처럼 아들만이 아버지를 안다”라는 의미로 이해돼야 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논리적 결론이요 예수님의 사명에 관한 핵심적인 말씀이라 한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이것은 아버지만이 아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아바 관계(Abba relationship)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아버지의 임재를 의식하고 아버지만을 의지하신다.


 ‘아바’(abba)라는 말은 헬라어의 ‘파테르’(πατήρ)를 번역한 아람어 술어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아바’라는 아람어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로 알려져 있지 않고 작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사용하던 애칭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람어 ‘아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칭이 쿰란 기도문에서도 등장할 뿐만 아니라 ‘아바’란 말이 작은 어린아이들에게 국한돼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
바울이 아람어와 헬라어의 결합 형태를 사용한 것은 헬라어를 말하는 초대교회의 기도문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특별히 ‘아바’란 말은 예수께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술어였으며, 이것이 마가복음뿐만 아니라(14:36) 헬라어를 말하는 바울의 교회들 가운데서 보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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