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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28

“경륜”(오이코노미아)이라는 말은 ‘청지기가 되다’ 혹은 ‘관리한다’ 뜻을 가진 오이코노메오에서 유래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청지기직’을 가리키나 일반적으로는 ‘관리,’ ‘경영’ 그리고 ‘행정’을 뜻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의식 활동에 의한 영원한 계획과 작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 경륜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작정과 계획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진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세워졌고 그리스도께서 인생 안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오이코노미아(경륜)는 ‘관리하는 행위,’ ‘준비 혹은 계획을 관리받는 것’ 그리고 ‘관리자의 직위나 역할’을 의미한다. 후기 교부들의 문헌에서 오이코노미아는 신적인 계획과 구원 계획을 가리키는데 사용됐으며 또한 언약신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오이코노미아를 ‘언약’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대해 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의 계획이나 혹은 구원의 의미를 지닌 교부들의 견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읽으며, 또한 관리나 질서의 능동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에 반대해 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의 전체계획으로 단순히 “비밀·신비”(뮈르테리온)와 동의어로 사용해야 된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4절에 은혜의 경륜(오이코노미아)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하나님의 경륜을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사용된 “하나님의 뜻”(카타 토 델레마 투데우)은 바울서신들 속에 잘 확립되어진 구절이다.  바울서신에서 뜻이란 말을 24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하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란 하나님의 뜻은 성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뜻을 세우시는 분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그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영원한 작정을 세우셨다. 그 작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셨으니 이를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경륜이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경륜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인류구원의 계획이 들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인류구원이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로서의 관심이라는 배경에서 이해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로널드 펑은 우리 하나님과 아버지의 뜻은 궁극적이고 이전의 근본적인 구원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님’이란 이름은 그 분의 전능하심과 초월적인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명칭은 그분의 뜻이 단순히 지혜와 전능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그분의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아버지와 아들이 행하시고, 또한 사도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며,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끊임없는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을 강조한 언약신학의 체계적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하네스 콕케유스가 하나님의 두 위격 간에 이뤄진 영원한 구원 작정을 구속 경륜으로 이해했다.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서 계획된 일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경륜으로 볼 수 있다. 철저히 역사적 계시에 의존하여 성경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구속경륜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고 누구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시기로 하시고 이 작정을 계시하셨음을 하나님의 구속경륜으로 이해한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세워진 경륜이 잘 나타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생을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의 고백이고 충성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시다. 이를 ‘정죄하지 않는 진리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 거짓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아들의 행동은 아버지의 사랑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죽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영원하고 참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선하심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성 안에서 영원한 작정과 경륜이 세워진 것이다. 제임스 던도 갈라디아서의 1장 1절의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에서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타난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보호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권한을 가지고, 사람들과 그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창조와 재창조자로서 그의 최고의 권위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초점을 바꾼다고 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바울이 언급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돼야만 하는 즉, 하나님이 창조를 하신 목적이라 했다. 그것은 현재의 악한 시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목적인데 그 구원은 현재의 부패한 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충만함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명히 그 계획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이 계획됐다. 아버지는 창세전에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를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기를 계획하셨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해 그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신다.


이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세워질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는 계획이 이미 정해진 것이다(엡 1:23). 사도 요한은 우리를 그 사귐 안으로 부르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요일 1:3).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곧 진리의 사랑의 관계로 나타내시고 우리를 그 영원한 관계 안으로 이끄신다.

그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 안에 낳아지게 된다. 곧 아버지와 아들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 하셨다(요 20:17).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짐을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갈 3:15-22)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과 그리스도 안에 세우신 경륜을 따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는데,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으로 복 주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엡 1:3). 그 기쁘신 뜻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했다. 약속은 바울이 이미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칭찬할만한 행위나 평생의 순종이 아닌,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거저 주시는 기쁘신 뜻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의 약속 또는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 언약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품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롭다고 칭의해 주었다(롬 4:22).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은 복의근원, 장차 올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인데 이를 이루어 주시러 육체(아브라함의 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셨다. 그 증표로 사라에게 이삭이 태어나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의 씨로 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켜 주실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고 기다렸으니 이를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치기 위해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창 17:9 이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뤄질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았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다(히 6:15).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좇는 자들은 이방인일지라도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이는 혈통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된다(롬 4:10).


김종이 목사 성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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