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청년시절 군대에서 근무할 때다. 바로 위 고참 하나가 그렇게도 괴롭혀 너무 힘들고 어려워 각오를 하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모두 잠들어 있는 내무반에 들어가 군에서 사용하는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 괴롭힘을 주던 고참 머리 위에 서서 검을 들어 '같이 죽자'라는 마음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그렇게도 괴롭히던 고참의 얼굴에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손에 힘을 주면 새벽 네 시 반만 되시면 교회에 가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보여 포기해야 했다. 그러기를 세 번 정도 됐을까, 그러다 보니 제대하게 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 옛날 분으로 글 하나 배우신 적이 없으셨지만 교회를 다니시며 성경을 읽으시고 찬송을 보시고 부르시는 모습에 형님들조차 “하나님이 계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 어머니 보니 계신 것이 확실하네.”고 하셨다.
절에 다니시다 예수님을 만나 교회에 다니시면서 한 겨울 새벽에 일어나 교회를 가실 때마다 찬물로 목욕하시고, 머리를 감으시고 가셨다.
신학교 학생시절이었지만 “어머님 그러다 큰일 나요. 감기 들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말씀드리면 “어찌 하나님께 가는데 그냥 갈 수 있냐?”하시며 그렇게 새벽 기도를 다니셨다.
어느 날 노년의 몸으로 일하시다 다치셔서 꼼짝하지 못하시고 누워계시다 조금 몸을 추리게 되시자,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에게 “애야, 나 좀 교회 데려다 줘라.” “아구 아직 몸도 편찮으신데 안돼요.” 신학생이지만 공부를 핑계로 잠을 더 자고 싶어 만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 나 좀 업고 교회 데려다 줘. 죽어도 교회 가서 죽고 싶어.”며 하시는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등에 업고 20여분 거리의 교회로 향했다.
그런데 힘든 아들 생각보다 교회 간다는 기쁨에 아들 등에 업히셔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음도 안 맞는 노래를 하신다. “몸도 편찮아 업혀 가시면서 뭐가 그렇게 좋아요?” 짜증 섞인 질문에 “아파서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좋은 하나님께 기도하러 가는데 얼마나 좋으냐?” 그렇게 교회에 모셔다 드렸다. 늦게까지 남들 다 가신 후에야 일어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군에서 위험한 순간에 그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만약 그때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돌아보면 아찔한 순간이지만 그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새벽 기도의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던 날도 그렇게 우셨던 어머니는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던 어느 날 뒤에 앉으셔서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설교자로서 ‘설교에 은혜가 되셨나 보다.’ 생각을 하고 예배 후에 웃으며 여쭈었다.
“오늘 왜 우셨어요?” 그러자 “우리 아들이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열심히 땀 흘리며 애쓰는 모습 보니 안쓰러워서.” 하신 말씀에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이나마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자리에 앉아 계신 것 같은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설교한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기도로 어머니의 기도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기도다. 먼저 믿은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심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링컨의 고백이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한다.
그 기도는 항상 나를 따라 다녔고, 내 평생 동안 그 기도는 나에게 꼭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주여, 자녀와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가 회복되도록 힘을 주소서.
김태용 목사 백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