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혹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의 한 가지가 상대의 혈액형을 가지고 성향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A형은 이런 성격이고, O형은 저런 성격이라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위로받기도 한다. 적어도 상대가 특정한 행동을 하는 배경에 혈액형이라는 이유가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러려니’하고 넘기게 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도 사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MBTI라든지 기질별, 성격별 구분 등 여러 가지 도구를 통해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면서 상대나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용납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 소개한 분노 표출의 방식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Harriet Lerner 박사가 구분한 5가지 분노 조절의 스타일은 내가 과연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고 조절하는가를 깨닫게 돕는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이해와 용납에만 머문다면, 건강하지 못한 감정표현의 패턴을 반복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 자신의 상처, 분노의 뿌리를 알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 갈 것인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고”(시37:5) 우리의 앞날을 여호와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길을 마지막까지 완수해야 한다(행20:24). 인생길은 짧으나, 하나님은 그 길에 따라 각각 사명을 부여 하셨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인생길을 완수하는 것이 된다. 하루 한 page씩 글을 쓰면 10년이면 3650page의 대저술을 할 수 있다. 인생이 비록 짧으나 한 가지 일을 계속하면 죽기까지 대사업을 성취할 수가 있다. 지금 나는 세계 비전을 보며 태평양 한 섬, 사이판(Saipan)에 다문화 인종을 대상으로 선교 센터를 세우고 땅끝까지 복음전파의 사명을 걸고 있다. 주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매일 매일 기도하고 있다. 인생길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 주를 만나봐야 한다. 인생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인생방향을 어디에 잡았는지 직고(直告)해야 한다. 무엇을 남겼는가? 도 중요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왔는가? 가 중요하며, 맡겨진 사명을 차근차근 잘 감당 했는가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돼야 한다. 인간이 공기 중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는
67년 전, 1950년 12월 22일, 흥남부두에는 여전히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 14000명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미 유엔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고, 뒤에는 중공군의 포격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부두 앞 바다에는 기뢰가 가득했다. 이때 7600t급 메러디스 빅토리호 화물선 선장 레너드라루 선장은 부두의 피난민들을 탑승하기 시작했다. 화물칸은 물론, 덮개 없는 갑판까지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태웠다. 사나운 겨울 바다를 항해하여 무사히 남한으로 모두 다 탈출시켰다. 라루 선장은 피난민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고 회고한다. 그의 행동은 생명의 열매를 맺었다. 그 당시 화물선에 선원은 47명이었고 정상적으로는 추가로 12명 태울 공간에 화물칸과 갑판에 14000명을 태워 생명을 구했다. 그 작은 배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고 수많은 위험 속에서 그 일을 하였을까? “하나님이 직접 빅토리아호의 키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선장은 이 때 받은 감동의 영향으로 일생을 수도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14000명 평안을 위해 미국 뉴저지 주 뉴턴 수도원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보냈다. 당시 선원 로버트러리
결혼예비학교에서 “결혼의 사명”을 강의하다 보면 출산 문제가 등장한다. 가정사역자로서, 목사로서 다산(多産)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다 보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가 종종 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자녀를 출산해 양육하는 일에는 부모가 개인적으로, 경제적으로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국가가 아이를 낳아서 양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주면 자녀를 둘도, 셋도 낳아 양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이제는 사회적 상황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벅찬 시대가 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것은 우리들의 또 다른 욕심과 허영의 목소리가 아닐까?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불과 반세기 전의 우리 부모 세대는 개인적 여건이나 사회적 상황이 지금보다 결코 낫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부모 세대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녀를 많이 낳았다. 필자 역시 7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많은 자녀들이 비록 배고프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그 자녀들이 자라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건설해 놓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
우리는 분노를 뿌리째 뽑아내고 아예 화가 안 나는 상태를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교에서 아예 속세를 떠나며 평생 자신을 비워내는 훈련을 하는 이유도 우리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얽매이게 하는 감정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허락하신 것이 희로애락의 감정이다. 이것을 없애려하거나 억누를 때 엉뚱한 시간에 뜻밖의 모양과 강도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없애는가라는 불가능한 일보다는 어떻게 잘 표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편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마치 결혼에서 갈등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보다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제일 먼저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전에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루었다. 마지못해 대답을 해놓고 부풀어 오르는 불만이 화로 터지기 전에 ‘Yes’와 ‘No’를 겸손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이후에 분노의 폭발을 막을 수 있는 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어떻게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타 팀페는 ‘감정표현이 안전한 범위
센스있는 화내기에서 가장 조심스럽고 힘이 드는 부분은 역시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하는 일이다. 분노조절훈련 프로그램에서도 비교적 후반부에 들어가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에는 먼저 생각하고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전의 칼럼에서 다뤘던 대로 분노의 뿌리가 과연 어디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이다. 분노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자세히 들여다 볼 때 분노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생겨나기도 한다. 분노가 치밀 때에는 좀 더 건강하게 그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때리거나 부수거나 술, 담배, 마약 등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운동, 음악, 미술, 수다, 혼자 소리 지르기, 기도 등이 더 건강한 발산법임에는 틀림없다. 시간을 두고 이런 저런 방법을 연습할 때쯤 되면 이미 상대를 찾아가서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이나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그라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화나게 하는 상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상대의 의도가 나를 상처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확인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청년시절, 교회 내에는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 의사인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는 교회음악과에서 오르간을 전공했다. 몇 번 연주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 후 몇 년에 한 번씩 친구들 모임이 있었고 친구가 사는 병원의 사택에서, 그리고 그가 일하는 병원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 의사친구의 아내는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동화라는 장르에서 글로 폭발했다. 첫 작품은 ‘발레 하는 할아버지’로 초등학교 국어책에도 실렸다. 책을 발간 할 때마다 고맙게도 내게 안부를 묻고 책을 보내오곤 했다. 나도 침례신문에 써왔던 글이 제법 모여 강의교재 외에 도서관에 비치 할 수 있는 책을 처음으로 펴내게 됐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줬다. 그런데 그분에게 또 다시 책을 받았다. 벌써 네 번째 출간한 책이다. ‘노래하는 은빛거인’의 내용이다. 턱에 장애가 있어 발음이 어눌한 7살의 진이, 보육원 진이를 돕는 선생님, 진이만한 딸 은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버스기사아저씨가 있었다. 버스기사아저씨는 바닐라 향이 나는 치자 꽃을 버스에 싣고 그 꽃을 딸 은이라 생각하며 운전을 한다. 이 차를 탄 진이는 꽃에서 나는 바닐라 향을 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막14:38)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졸며 자다가 예수님이 잡혀가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가 하면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인데도 기도하기를 힘쓰시고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성도의 영적 삶에는 사탄의 다양한 방해가 있기 때문에 사단의 방해와 육신의 게으름을 이기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 신앙생활의 에너지는 말씀과 기도에서 나온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규칙적으로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기도하지 않게 되고 영성 없는 신앙생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되므로 기도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라 개인
분노를 잘 표현하는 것이 정서적, 육체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분노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맞닥뜨린다. 분노가 부정적인 감정이고 파괴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되도록이면 화내지 않고 화가 나도 표현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분노를 참고 티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표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우리의 감정은 말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도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할지 모르지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던지,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다던지, 갑자기 연락을 끊는다던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화를 낸다. 바로 수동 공격형(Passive-Aggressive) 방법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수동 공격적인 분노의 표현은 말을 안했다 뿐이지 인간관계에 해가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수동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 관계를 단칼에 끊어버릴 수도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줄 의도가 있든지 없든지, 확인이나 화해할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그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왜 내가 거리를 두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이며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삶에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고 예배시간을 잘 지켜야한다. 예배를 잘 드려야 구원을 받고 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기 때문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야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과 몸과 시간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의 예배를 원하시며 예배를 기다리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은 참된 예배 자를 찾으시며 성도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예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