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노를 뿌리째 뽑아내고 아예 화가 안 나는 상태를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교에서 아예 속세를 떠나며 평생 자신을 비워내는 훈련을 하는 이유도 우리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얽매이게 하는 감정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허락하신 것이 희로애락의 감정이다. 이것을 없애려하거나 억누를 때 엉뚱한 시간에 뜻밖의 모양과 강도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없애는가라는 불가능한 일보다는 어떻게 잘 표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편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마치 결혼에서 갈등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보다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제일 먼저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전에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루었다. 마지못해 대답을 해놓고 부풀어 오르는 불만이 화로 터지기 전에 ‘Yes’와 ‘No’를 겸손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이후에 분노의 폭발을 막을 수 있는 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어떻게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타 팀페는 ‘감정표현이 안전한 범위
센스있는 화내기에서 가장 조심스럽고 힘이 드는 부분은 역시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하는 일이다. 분노조절훈련 프로그램에서도 비교적 후반부에 들어가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에는 먼저 생각하고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전의 칼럼에서 다뤘던 대로 분노의 뿌리가 과연 어디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이다. 분노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자세히 들여다 볼 때 분노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생겨나기도 한다. 분노가 치밀 때에는 좀 더 건강하게 그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때리거나 부수거나 술, 담배, 마약 등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운동, 음악, 미술, 수다, 혼자 소리 지르기, 기도 등이 더 건강한 발산법임에는 틀림없다. 시간을 두고 이런 저런 방법을 연습할 때쯤 되면 이미 상대를 찾아가서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이나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그라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화나게 하는 상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상대의 의도가 나를 상처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확인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청년시절, 교회 내에는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 의사인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는 교회음악과에서 오르간을 전공했다. 몇 번 연주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 후 몇 년에 한 번씩 친구들 모임이 있었고 친구가 사는 병원의 사택에서, 그리고 그가 일하는 병원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 의사친구의 아내는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동화라는 장르에서 글로 폭발했다. 첫 작품은 ‘발레 하는 할아버지’로 초등학교 국어책에도 실렸다. 책을 발간 할 때마다 고맙게도 내게 안부를 묻고 책을 보내오곤 했다. 나도 침례신문에 써왔던 글이 제법 모여 강의교재 외에 도서관에 비치 할 수 있는 책을 처음으로 펴내게 됐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줬다. 그런데 그분에게 또 다시 책을 받았다. 벌써 네 번째 출간한 책이다. ‘노래하는 은빛거인’의 내용이다. 턱에 장애가 있어 발음이 어눌한 7살의 진이, 보육원 진이를 돕는 선생님, 진이만한 딸 은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버스기사아저씨가 있었다. 버스기사아저씨는 바닐라 향이 나는 치자 꽃을 버스에 싣고 그 꽃을 딸 은이라 생각하며 운전을 한다. 이 차를 탄 진이는 꽃에서 나는 바닐라 향을 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막14:38)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졸며 자다가 예수님이 잡혀가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가 하면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인데도 기도하기를 힘쓰시고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성도의 영적 삶에는 사탄의 다양한 방해가 있기 때문에 사단의 방해와 육신의 게으름을 이기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 신앙생활의 에너지는 말씀과 기도에서 나온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규칙적으로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기도하지 않게 되고 영성 없는 신앙생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되므로 기도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라 개인
분노를 잘 표현하는 것이 정서적, 육체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분노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맞닥뜨린다. 분노가 부정적인 감정이고 파괴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되도록이면 화내지 않고 화가 나도 표현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분노를 참고 티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표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우리의 감정은 말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도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할지 모르지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던지,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다던지, 갑자기 연락을 끊는다던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화를 낸다. 바로 수동 공격형(Passive-Aggressive) 방법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수동 공격적인 분노의 표현은 말을 안했다 뿐이지 인간관계에 해가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수동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 관계를 단칼에 끊어버릴 수도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줄 의도가 있든지 없든지, 확인이나 화해할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그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왜 내가 거리를 두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이며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삶에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고 예배시간을 잘 지켜야한다. 예배를 잘 드려야 구원을 받고 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기 때문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야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과 몸과 시간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의 예배를 원하시며 예배를 기다리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은 참된 예배 자를 찾으시며 성도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예배라
“나는 정규적인 교회사역을 통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의 문제는 설교로 해결되지 못했고 헌신이나 기도나 성례전 등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외적인 믿음의 표현으로 기도를 하고 헌금을 드리고 죄를 자백하는 일은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깊은 회의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갔다.”(데이빗 A 씨멘스) 한국교회의 21세기 목회는 가정중심 목회와 치유상담 목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현대 가정들은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위기를 맞고 있고 이혼과 별거, 폭력, 가출, 일 중독, 알코올 중독, 성 중독, 이혼, 자살, 청소년 비행 등으로 역기능 가정들이 심각하게 늘어가고 있다. 교회지도자 가운데 가정사역과 가족 상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막상 교회 안에서 가정사역을 시작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와 가정은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공생적인 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이 행복하고, 행복한 가정이 모인 교회가 힘이 있다. 교회안의 가정사역에는 교육적인 접근과 치유 상
목회자와 사모로서, 혹은 교회의 리더로서, 분노의 섣부른 표출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인들 중 누군가 ‘시험’을 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그나마 자신의 마음 상태에 어느 정도는 책임을 지는 말이다. 이 말은 어찌 보면 갈등을 통해 교회가 든든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는 사단의 역할도 인지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흔하디 흔한 ‘상처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상처를 입힌 가해자가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분노를 겪거나 목격한 성도들이 이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소그룹의 리더와 갈등이 생기고 격한 말이 오가면 그룹원 또한 그 신앙공동체를 떠나기도 한다.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중책을 맡은 리더로서 알지 못하는 사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라도 우리는 조심하고 참는다. 목회자들이, 목자들이, 교회의 리더들이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다 삭이고 기도로 ‘푸는’ 것을 미덕으로 안다.그런데 이렇게 참고 참은 화가 온데 간 데 없어지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분노가 여과 없이 분출될 때 내 주위 사람들에게 크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하
집을 지을 때 계획을 하고 준비가 되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설계도면이 그려지고 건축허가를 받고나면 집짓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먼저 터 고르기를 하고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 다음에 골격을 만들고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며 순서를 따라 배관공사 전기공사를 하면서 공사가 진행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먼저 할 것을 먼저 하고 나중할 것은 나중하며 우선순위를 따라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간혹은 배선 공사를 빼먹고 공사를 했다가 이미 굳어진 시멘트를 깨내고 배선 공사를 하느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짓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진행하면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는데 우선순위가 없으면 혼란이 생기고 틀어진 것을 나중에 바로 잡으려면 몇 배나 더 힘들게 수고를 해야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도 때로는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면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우선순위를 정해 놓으면 우선순위를 따라 처리해 나가면 쉽게 정리가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예수님은 이 말씀 앞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이시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그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을 살아야 신앙생활이 행복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필자가 청리교회에 초청을 받고 부임 했을 때는 갓 서른의 젊은 목사였다.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 둘의 아빠가 되긴 했지만 얼굴이 동안이어서 나가면 총각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 한창 오토바이 붐이 일어나서 시골 교회에 목사님들이 오토바이를 많이 타기 시작을 했을 때였다. 그 때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부럽기도 했다. 부임해 며칠 지난 어느 날 집사님이 불러서 나갔더니 남자 집사님 두 분이 효성에서 나온 100cc 신형오토바이 한 대를 마당에 세워 놓고 목사님께 드리는 거라며 키를 건네주는 데 생각 밖의 선물에 큰 감동을 받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생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