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원고까지는 3번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위의 4번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 4:6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돼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 의 법을 버리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평생 자녀들 뒷바라지로 살았습니다. 학교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밤낮없이 밭에서, 논에서 해질 때까지 일하면서 80년 넘는 세월을 살며, 저에게는 밭이 학교였고, 호미자루가 연필이었답니다. 그런데 진도군에서 문해학교가 생겨 용기를 내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멋진 책상과 의자가 있는 교실이 좋았고, 내 책, 연필, 공책, 필통으로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재밌기도 했지만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 속상하기도 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이 되어 떳떳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날, 졸업생 대표로 낭독한 한 엄니 학생의 글이다.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 버리기가 쉬운 연세에 있는 분들이 학창시절에 못한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늦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장날 장에 갔다 시간을 맞춰 달려오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병원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날에는 빠질 수 없다며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받아
습관은 여러 번 반복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생긴 버릇이다. 이것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는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으며 좋은 습관은 범사에 유익과 성공이 있게 한다. 반면에 나쁜 습관은 개인의 삶을 피폐케하며 국가적으로는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B.C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패망케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시길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청종치 않는 나라의 백성 들은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정부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하게 패망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의 삶에서 습관이 있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셔서 늘 성경을 읽으셨고(눅4:16) 마을들을 찾아다니시며 전도하셨다(막1:38). 특히 밤이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쉬거나 기도하셨다 (눅22:39).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 기도하기, 복음전하기, 봉사하기 등이 예수님처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불태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수많은 짐승이 죽었고 이런 제사를 끝도 없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장도 백성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드리며 제사를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를 계속 드리며 지쳐 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를 끝내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속죄’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몇몇 청년들과 공원에서 만났다. 햇살도 따스했고, 공기도 상쾌했다. 게다가 모두 코로나 백신을 맞아서 마음도 아주 편했다(미국에서 목회하다 보니 성도 대부분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늘 그랬듯이 아주 반뜻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여기가 병원도 아니고 마트도 아닌데, 우리 너무 오바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자 모든 청년들이 미리 이야기라도 한 듯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쓰면 허전해요.” 코로나가 사라져도 영원히 마스크는 안 벗을 태세였다. 코로나19가 세상에 등장한 지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이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특히 마스크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됐다. 우리 모두는 연일 마스크가 코로나를 얼마나 잘 예방하는지에 대한 놀라운 뉴스들을 접하다 보니, ‘마스크 강박증’이라고 할 만큼, 마스크를 안 쓰면 죽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마스크 강박증’은 코로나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믿음직한 마스크를 아주 오래 전부터 쓰고 살아 왔다. 심리학에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말하는 것
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