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후로도 무엇을 더 가져서 혹은 무엇을 더 배워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구나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넉넉한 마음과 자원을 매순간 받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오늘의 삶이나 남은 생애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투명하고 친밀한 관계만큼 더욱 맑고 밝게 세워지고 풍성해진다는 진실을 어떤 형편 중에도 잊지 않고, 잃지 않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여, 오늘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원을 충만히 채우게 하소서.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라가게 하소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애당초에 나에게는 없었던 영적이고 정신적인 자원을 지극히 제한된 생애임에도 불구하고, 진하게 경험하고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에게는 절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일은 나와는 전혀 무관할 수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눈과 귀가 약속의 말씀으로 더욱 맑고 밝게 열리게 하소서. 어느 새 또다시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더욱 넓고 깊게 정돈되게 하소서. 이즈음의 과정도 그리고 이후로 얻게 될 열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 채워지게 하소서. 남은 생을 통해서도!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하여, 그말씀 그대로: 베드로전·후서' 저자
이에 오창희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예수는 단순한 마음으로 찾아야 가능하고, 그리스도 이후에는 사변이 필요 없다는 다소 강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 말은 신앙과 이성, 종교와 철학을 완전히 떼어놓는 것이고, 대립적인 걸로 보는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건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고, 불합리하다는 건 이성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고 종교적으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신앙의 초월적 측면을 잘 드러내고는 있으나 너무 극단적이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철학이나 문화 활동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는 사실이다. 덴마크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인 동시에 19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로 알려진 키르케고어 역시 신앙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유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아케다(Aceda) 사건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데 이런 명령을 따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아브라함에게 무조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
에베소서 1장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를 지금도 잘 알고 있다면, 남은 생도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자원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보하거나 절제하면서까지 나의 안과 밖을 살리고 세우는데 집중하려 합니다. 이즈음에 또다시 더해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영적인 책임감 앞에서도 수고하고 땀 흘리기를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나아가 오늘도 살아 있음에 더해진 갖가지 자원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에 따라 지혜롭고 정직하게 관리하며 유통하려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교훈하시고 명령하시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월의 흐름만큼 반드시 더욱 깊이, 더욱 멀리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더욱 맑고, 더욱 밝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 남겨진 흔적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참으로 믿을만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여, 깨어 있는 그리
나는 호세아 4장 6절을 토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번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추구하는 것,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호 6:1, 3). 간단히 한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예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선 “내가 너희 중에 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18개월 동안 머물던 때를 말한다. 그 당시 사도 바울 앞에 전 세계가 열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행하셨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근본적으로 삶이 변할 뿐 아니라, 때로는 도시들이 변화됐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사역 후기에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빌립보서 3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빌 3
신앙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대두된 것은 무엇보 다도 타문화 속에 드러난 자신을 이제는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다. 타종교를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자신의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문제는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타종교를 경험해 왔으며, 그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최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던 시대이다. 철저히 신중심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이제 중세를 지나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 시대의 지배자로 등극한 21세기에 과연 신앙은 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성은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신앙과 이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반목하면서도 공존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며 세계의 종교로 변신하는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새롭게 정립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부분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최초로 쟁론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8) 그러나 바울의 초점은 선교였고, 철학자들의 초점은 학문적 토론에 두었기에 이 둘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입장을 보였다. 즉 바울과 철학자,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는 서로에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바울의 여정을 드려다 보면 초기 철학이 추구하는 이성의 절대성으로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우려로 철학에 대한 경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골로새서에 잘 드러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오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노후에 관한 생각이 절로 마음에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이에게 닥치는 자연적인 현상 으로 여겨졌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진 것은 없고, 그렇다고 노후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불안함과 염려가 마음에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늘 그랬듯이 모든 인생의 해답은 성경에 있으니 성경에서 기도하며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애굽 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매일 세끼 똑같은 만나만 먹고, 재래식 화장실과 장막 생활을 한 것을 볼 때 나 또한 그렇게 못 살라는 법이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하니 말씀 안에서 자유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연금 받고 산 것도 아니고 반면에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옥 생활도 하고, 심지어는 고문 등 순교까지 했는데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자며 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이나 잘하자” 라며 예전보다 더욱 신앙의 허리띠를 동여맸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시는 어느 원
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 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 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돌아 다녀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들은
요즘 전세계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 때문에 난리다. 미국 에서 목회하는 필자에게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놀랍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에게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 봤냐고 묻는다고 한다. 정말 한국 게임들 중에 구슬치기, 뽑기 등이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실은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까지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넷플릭스에서 계속 몇주째 1위다. 요즘 한국 사람으로 매우 살만한 세상이다. K-콘텐츠가 세상을 휘어잡고 있다. 쇼핑몰에서도 BTS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종종 듣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 그러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던 우리에게 기생충, 미나리 같은 영화의 성공과 오징어게임의 흥행은 놀라운 그 자체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IMF를 겪으면서 콘텐츠의 힘을 깨닫게 됐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IMF와 금모으기 운동을 따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꼭 독립운동하듯 금을 모았던 기억이 필자에게도 있다. 그런 온 국민의 노력이 당시 개봉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 한 편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외국 영화 한 편이 한국에서 벌어간 돈이 온 국민이 헌신했던 금 모으기 운동의 금액과 비슷했던 것이다. 나라의 어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