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는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많이 사용됐으며 또한 요한은 인자 칭호를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과 그 유일한 분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성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인자’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존재로써 유대인들이 보기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닌데 기적적 일들을 행하시며 감동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자’는 근원적으로는 영원한 권능의 인격의 하나님이신 로고스이시며 화육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 사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존재로 복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인자 말씀(요 13:31)을 통해 화육의 사명을 완수하신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로 돌아가심에 관하여 알아본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가룟 유다와의 대화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반의 마음을 간직한 채 만
어느 충청도 산골마을 아래와 윗동네에 젊은 나무꾼과 나이든 나무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도끼를 각각 하나씩 사서 젊은 나무꾼과 나이든 나무꾼이 같은 장소에서 시합이라도 하듯 나무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나무꾼은 그 젊음의 힘을 자랑하듯 쉼 없이 열정적으로 나무를 패듯이 베었고, 나이든 나무꾼은 짬짬이 쉬어가며 나무를 베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을 마치고 서로가 해놓은 나무를 보던 젊은 나무꾼은 쉬지 않고 벤 자신의 나무가 훨씬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적어서 놀랐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나이든 나무꾼이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자네는 오늘 하루 쉴 새 없이 도끼질을 했지만, 나는 잠시 짬을 내어 쉬면서 무뎌진 도끼날을 다시 세우며,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라네” 성경에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처녀 모두 등과 기름을 가졌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자니 불을 밝히는 기름을 넉넉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신랑이 오기도 전에 기름이 다 타서 등불이 꺼질 것입니다. 이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다른 그릇에 충분하게 여분의 기름을 채워왔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1. 인정 198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Art Institute of San Francisco)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순수 미술을 공부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의 외모와 사생활과 그리고 저들이 그리는 그림들이 저에게는 대다수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동성애자들도 있었고, 쉬는 시간에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예사로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그리는 그림들 대부분이 너무 잔인하고도 포학한 내용이 많았으며, 인간의 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문란하고 난잡하기가 짝이 없는 마치 지옥 세계를 방불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저들과 함께 공부하려고 하니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학교에서 졸업할 때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졸업을 눈앞에 두게
진도에 내려와 4년이 안된 시간에 벌써 3번이나 이사를 했을 때 아내가 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도 11년 사는 동안 대여섯 번은 이사를 한 것 같다. 계획도 없이 이사를 하며 새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날 그 많던 모든 짐들을 다 정리하고 나눠 주고 없앤 후에 가방 몇 개 들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어렵게 그 많던 짐들을 정리하며 이제 짐 없이 살자고 다짐하며 살았지만, 십여 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또 무엇이 그렇게도 많이 쌓였던지 이것저것 다시 버리고 나서 가방 몇 개 들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땅 끝인 진도에 오면서는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4년도 채 안된 시간에 다시 이사를 하며 쌓아놓은 짐들을 정리하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무슨 짐들이 이렇게 많은지 짐을 옮길 때마다 나눠줄 것과 버릴 것이 그렇게도 많은데 쌓아놓고 살았던 것이다. 이사를 하며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아직 박스에 담겨 풀지 못한 짐도 있다. 다시 언제 또 거처가 옮겨질지 모르는 생활에서도 당장 쓰지 않는 것들은 쌓아놓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천국에 가야 할 때도 너
목회자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 Y목사님이 대표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은 왕이시요,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 믿기 전에는 열심으로 도를 닦아온 ‘수도자’였다. 알지 못하는 전능자를 찾아서 자신과 합일을 이루며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참선을 해왔다. 그것을 위해서 직장을 바꾸기도 했고, 설악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련을 쌓는 경력이 아주 많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베드로처럼 주님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하는가가 궁금했다. 그의 얘기로는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영성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그에게 최고의 큰 도(道)를 알려주겠으니 믿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후 산에다 텐트를 치고 몇 개월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는데 이런 것도 있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한 번은 기도하는 데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빛이 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도를 닦으며 쌓아온 모든 것들을 부수며 날려버
그 동안 모아온 글들을 엮어 ‘우리는 주님의 동산이다’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졸작이지만 여러 선, 후배 목회자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막상 누구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책을 받았다는 연락조차 없었지만 대부분 핸드폰으로 말이나 글로써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그들 중에는 감동 있는 글이기에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거나 부부가 함께 읽었거나 교인들의 모임에서 독후감을 나눠봤다고 알려줬다. 이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 병원 원목, 교회 담임 목회자 등을 역임한 선배이시다. 이 분이 카카오톡으로 나에게 글을 보내주셨다. “김 목사님, 선물해준 책을 매일 밤마다 한 편씩 읽고 있어요. 매 편에서 귀한 의미를 얻습니다. 앞으로도 매일 밤에 한 편씩 읽을 거예요” 두 달이 지난 후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마지막 편을 읽었어요. 그동안 잠자기 전에 한 편씩 재미있게 읽어왔어요. 179페이지에 오자가 있던데 고치면 좋겠어요” 이 분은 연세가 우리 나이로 88세인데 어쩌면 후배가 쓴 책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눈의 피곤으로 책 읽기를 그만 둘 수 있을 텐데 끝까지 읽어주셨
지난 원고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상황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자기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심겨지는 밀알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그 말씀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증언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과 그것에 대답하신 말씀에 담긴 인자의 존재에 관하여 살펴본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리의 반응을 전달한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말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 무리는 율법에 기초한 메시아관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함을 언급한다. 여기서 무리가 가진 메시야관이 무엇이며 또 그들이 올리어지심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제시된다. 먼저 무리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을 말한다고 간주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율법이 무엇인지는 구체
“그 이유를 말해주마. 처음에는 나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엘리 위젤, 리처드 D. 헤프너 공저(共著) ‘이방인은 없다’(산해, 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옛날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까지,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져 성이 망하는 그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이방인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그의 말을 듣고 약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외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외치고 있는 이 이방인의 말에 감동받은 아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불쌍한 아저씨, 아무리 아저씨가 외쳐도 사람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이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나는 그
둘째로 일관성이란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균등하게 적용됩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성경의 해석과 법의 적용에 있어서 일관성(균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혜나 무시가 없을 때 분파가 생기지 않고, 지역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부나 세리 또는 죄인의 영혼이나 서기관 혹은 제사장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든 사마리아이든 어느 땅이든지 간에 균일하게(일관되게) 실천하신 예수님을 봅시다. 세리의 집에 유하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의 자녀는 접시 하나만 깨도 부주의한 녀석이 되고 내 아이는 장독을 깨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장독이나 된장은 또 사면 되는 것이니까”하는 식의 적용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빵을 보상한 작은 악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 두목이 승진을 기다리는 작은 악마의 능력 시험을 위해 농부를 화나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농부는 여느 때처럼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낮이 되어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으나 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작은 악마가 먹어치워 버린 것입니다. 농부는 허기졌으나 심성이 착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K집사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방문해 기도한 후에 갑자기 강사가 K집사 부부에게 당황할 말을 던졌다. “이 집 부부는 자녀를 왜 이렇게 심히 미워한데요?” “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할뿐더러 교육에 대한 열정도 대단합니다.” 아내가 민망해하며 분위기를 바꾸려하자 “틀림없이 어느 자녀를 미워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알려주시니 말하는 겁니다.” 강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같은 뜻의 말을 전해줬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K집사 부인이 그 말을 인정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둘째 딸을 외국에 입양시키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얘가 워낙 힘들게 하고 미운 짓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싫어지고 미워지더라구요.” 나는 담임 목회자로 이 가정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녀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상태인 줄은 그때서야 알게 됐다. K집사의 둘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는 장애를 가졌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정상인처럼 만들기 위해선 병원 수술비 부담도 엄청나게 컸을 뿐더러 가족들 고통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