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맺은 1992년 이후로 각 교단과 선교회는 앞다퉈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우리교단 해외선교회(FMB) 역시 1995년에 최초로 박OO 선교사 가정을 중국으로 파송했다.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선교사의 중국 선교 부흥기로 FMB 중 선교사 가정이 70유닛에 육박하기도 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헌신과 희생은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의 핍박과 박해의 역사를 경험한 중국 가정교회에 기폭제가 됐다. 중국 교회가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성장과 발전에 영향과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1949년 이후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강경하고 단호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를 둘로 나누고, 대립과 대적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했다. 아직도 공인 교회인 삼자교회와 비공인교회인 가정교회의 구분은 명확하게 나눠져 대립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2018년 신종교 사무조례의 시행은 중국 내 외국인의 종교활동을 제한하는 것과 더불어 선교사들의 존립을 어렵게 했다. 소위 기독교 중국화 정책의 가동으로 본격적인 중국 가정교회 박해와 외국 선교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이후 대부분 선
2023년 제113차 정기총회에서 우리 교단은 매우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교단 내에 침례교사회복지봉사단(추진위원회)을 만들었다는 것은 한국 침례교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특히 올해 4월 14일을 총회가 주최하는 장애인 주일로 지정해서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변화를 적극 환영합니다. 장애인 주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주일의 역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에서 1989년에 모든 회원 교단에 장애인운동위원회 설치와 장애인 주일 제정을 권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는 교회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장애인 주일은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본받아, 장애라는 벽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모든 사람이
한국 침례교단은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가 1889년 12월에 내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침례교회(동아기독교)는 북한에 60개, 남한에 40개, 재만・재러에 150개의 교세를 형성했다. 이는 선교지 분할협정(comity)으로 인해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서강동약(西强東弱)의 특징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강한 교세를 형성했지만, 우리 침례교단은 원산 총부를 중심으로 함경남북도에 교회를 집중적으로 세운 동강서약(東强西弱)의 교세를 형성했다. 1945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이 된 이후 북한의 침례교회(동아기독교)는 해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교회는 침례교를 비롯해 장로교・감리교는 모두 사라졌고 북한 당국이 공인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외에 가시적 교회는 사라졌다. 그러나 두 가지 형태로 북한에서 교회는 존재하고 있다. 그 첫째는 분단 이전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과 그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한 ‘그루터기 교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급성장한 새로운 교회의 형태인 ‘지하교회’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인 90년대 중반 이후 남한으
존 로스는 조선어(한글)를 몰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문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더라도 복음을 전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이응찬은 무역 상인으로 조선에서 물건을 배에 싣고 중국(청나라)으로 가려던 중, 압록강에서 풍랑을 만나 모든 재산을 잃었다. 비록 그는 겨우 살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과 허탈감 속에서,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하루 끼니를 동냥하며 고려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문에서 서양 종교를 전하는 양인(洋人)에게 가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응찬은 배고픔에 존 로스를 찾아온 것이다. 존 로스는 행색이 초라했던 이응찬을 보고, 더구나 그의 사정을 듣고 참으로 마음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당시 존 로스는 당시 이응찬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중인계급(中人階級)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배에 물건을 싣고, 고려문(高麗門)으로 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갑자기 강한 서남풍(西南風)을 만났다. 그 배는 전복되었고, 물건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 물건 임자는 목숨은 건졌지만, 알거지가 됐다. …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그 사
엄마에게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다 줬다. 못다 핀 꽃봉오리 사이로 노란빛을 야금야금 드러내며 한동안 비어있었던 유리병을 채웠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엄마는 노란 꽃을 볼 때마다 당신이 좋아하는 예쁜 프리지어 이야기를 해왔을 것이다. 꽃집을 나와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동안, 창밖의 쏜살같이 지나가는 어지러운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자 옹기종기 모인 찬란한 꽃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노란색들이 엄마 얼굴을 서물서물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하게 저며왔다. 우주의 9번째 자리를 채우던, 그러나 태양계에서 쫓겨나 영원히 이방인이 된 소행성. 나는 명왕성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두 문짝이 서로를 자꾸 긁고 밀다가 생겨난 부스러기처럼 이곳저곳을 굴러다녔다. 세 살 때부터 따로 살았던 부모님,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살게 된 후로도 밥 먹듯이 쌌던 이삿짐. 뿌리내릴 새도 없이 나는 어떤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 같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외로웠고 지긋지긋했다. 겨우 한 가족이 자리를 잡아 같은 동네에 산 지 두 해를 넘기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게
전 세계 이용자가 5억 명에 달하는 외국어 학습 앱인 ‘듀오링고’에 따르면,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다음인 다섯 번째로 인기 많은 외국어다. 그만큼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1위다. 구글 트랜드에 따르면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이 구글에서 한글로 검색하는 총량은 최근 5년 동안 3배 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 따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전 세계의 대학교 수는 1991년 151곳에서, 2022년 1400여 곳으로 무려 9.3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어의 영향력이 점점 세계화가 되는 점이 감개무량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라는 90년대 유행했던 말처럼, 현재 한국어의 세계화 돌풍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감사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지만, 한글의 띄어쓰기를 최초로 교재에 도입하고, 신약성경을 한글로 최초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가 가장 많이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과 그의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
조선선교를 준비하는 존 로스는 조선의 무역상을 찾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개신교단 중 세계에서 주류 교단인 침례교단은 한국에서 왜 이리 교세가 약할까? 왜 한국에는 장로교단이 득세할까? 이것에 대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 난무하다. 이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간단히 열거하자면, 첫째는, 일제 강점기 때 장로교단은 신사참배를 했는데, 침례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일제의 탄압을 받아 교세가 줄어들었던 점. 둘째는, 침례교의 정신을 가지고 있던 펜윅 선교사가 타교단 선교사와는 다르게, 한양에서 활동하지 않고, 지방 및 외각에서 활동했던 점. 셋째는, 침례교 선교사들이 한양 외 지역에서 활동했을 뿐더러, 타교단 선교사에 비해 의료 등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점. 그래서 한양에 병원이나 학교 등을 세워 기관사역을 하지 않았던 점. 때문에 당시 고종을 비롯한 조정 관리들과 친분이 없어 조정의 여러 지원을 받지 못했던 점. 넷째는, 침례교의 개교회주의 때문에 조직력이 약했던 점. 다섯째로는,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동아기독교 1921년 명칭 변경)의 설립이 1906년이라, 타교단보다 조직형성이 늦어졌다는 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과 이
안녕하세요! 저는 바른목양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박철민 목사입니다. 바른목양교회는 창립 4주년을 맞이한 작은 교회입니다. 오직 영혼을 생각하며 코로나 팬데믹 기간 고난과 인내의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말 우측 팔과 다리에 위약감이 발생해 병원에서 MRI 검사를 한 결과, 뇌종양으로 판정을 받아 상급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조직검사를 포함한 수술 시행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조직검사 시행없이 임상적 추정으로 방사선과 항암, 약물치료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뇌종양의 상태나 정확한 진행 사항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조직검사조차 할 수 없는 부위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숙제입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이 질병은 하나님이 고쳐주시리라 믿으며 기도합니다.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주시기를 원합니다. ◎ 질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돌리며 쓰시는 동역자로 빚어지게 하소서. ◎ 두고 온 교회(바른목양교회)와 성도, 가정과 자녀들이 인내하며 성숙하고 성장하는 광야학교가 되게 하소서. ◎ 오직 믿음과 부르짖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고 부인봉 목사(대위)는 육군 3사단에서 침례교 군목으로 임관해 군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순직하셨다. 그는 박준택 목사와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 64년 입학 동기생이었다. 현재 살아계시면 85세이시다. 그는 196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사병으로 전역했음에도 군 복음화의 귀한 사명을 깨닫고 1967년도에 군목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아 1968년에 3사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군복음화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환경도 열악해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강원도 철원에 있는 3사단에서 군목 사역을 시작했다. 1969년 3사단의 23연대(현 여단) 군목으로 예배와 병사들의 신앙전력화에 열정을 담았다. 그러던 7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주일 날, 부인봉 목사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그 당시 이동 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를 가는 중에 군용트럭과의 불의의 사고로 1969년 7월에 순직하게 됐다. 군 부대는 그의 안타까운 순직을 기념해 장례예배를 드렸다. 그 당시 사병이었던 박준택 목사는 공병대대 연병장 텐트를 치고 장례식 위원 병사로 대대장의 임명을 받아 장례식을 주관했으며 침례교 총회장과 임원들이 참석해 함께 위로의 시간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기 직전, 민중들에게 던진 성경책(한문)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낳았다. ‘박춘권’은 자신의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처음엔 받지 않았으나,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일 예수님을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교회(평안남도) 영수(장로)가 됐다. 그의 조카인 ‘이영태’도 그와 함께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됐고, 훗날 한국어성경 3분의 2를 번역하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11세(12세)였던 ‘최치량’은 작은 아버지와 제너럴셔먼호의 상황을 보러 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 3권을 주웠는데,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두려워 성경을 몰래 숨기고 있다가 한 권을 친분이 있던 영문주사(당시 군 위병소장)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성경 종이의 질이 너무 좋아 한 장씩 뜯어 자기 집의 벽지로 사용했다. 어찌 보면 세계 최초로 성경으로 도배된 집이 아닐까 여겨진다. 박영식은 벽지의 말씀들을 읽다 감동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다. 성경책을 전해준 ‘최치량’도 어른이 되어, 나중에 성경으로 도배 된 ‘박영식’의 집을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