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교회가 역사적으로 급성전염병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여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초기 교회의 전염병에 대한 해석과 대처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첫 3세기 동안 두 번의 국제적 전염병이 있었다. 첫 번째는 165년경부터 189년까지 창궐한 “안토니우스 역병”으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3 혹은 1/4를 죽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고대 도시는 인구 밀도가 매우 높아 질병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었다.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하던 1세기 중반 로마시의 인구는 약 45만 명 정도이며, 1,220평 당 302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인도의 캘커타가 122명, 뉴욕 맨해튼이 100 명인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붐볐음을 알 수 있다. 높은 인구 밀도는 심각한 위생 문제와 전염병의 확산을 야기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불린 두 번째 전염병은 249년에서 262년까지 지속됐는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시민의 2/3를 죽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교회는 급성전염병에 잘 대처해 로마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하게 됐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담임목사 디오니시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보(週報)는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그 교회 주보(週報)의 어느 부분을 보십니까? 대게 주보 뒷면에 보면 광고와 아울러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지난주일 출석 상황과 헌금자 명단을 집계한 것이지만 “주보 한 장”으로 그 교회의 교세와 형편을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교회에서는 통계란에 여러 항목을 만들어서 전체 숫자를 많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런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유령 숫자까지 넣어서 통계를 만드는 교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주보(週報)라고 하는 것은 주일의 예배를 안내하고 교회의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일종의 그 교회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즈음 대개의 주보는 “예배 안내”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교회 사진이나 큼직하게 넣고 목사. 전도사. 안수집사(장로)의 이름까지 전면에 게재해 한눈에 교회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하고 구역목장 통계나 조밀하게 해서 교인은 몇 명이나 되고 헌금은 어느 정도 나온다는 것을 선전한 “교회광고지” 같은 인상이 짙습니다. 하기야 요즈음은 “뜻” 보다는 “목소리”의 크기로 시비하는 세
코로나19가 터지고 2년 동안 충격과 폐해(弊害)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여파는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언제 끝날지, 얼마나 더 피해가 있을지 예단할 수 없기에 누구라도 ‘알 수 없음’으로 답해야 할듯하다. 최근 들어 다시 새로운 ‘변이’들이 또다시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어 참담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라는 시대적 팬데믹을 겪은 이후의 교회들은 “반드시 변화를 요구함”이란 과제 앞에 당면해 있고 이러한 변화로의 움직임도 이젠 다양하며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고 그 방법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 21년째 작은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는 농촌목회자의 생각이다. 현재 한국교회, 그중에 더 심각한 코로나 후유증에 힘겨워하는 농어촌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는 뚜렷한 대안 제시가 극히 미진한 것 같아 안타까운 현실이고 계속 나타나는 통계적 자료에만 눌려있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에 대한 대책이 묘연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필자가 목회하는 성암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로 이번 코로나19가 충
1818년 어느 늦은 밤. 오스트리아 잘차흐(Salzach) 강변에 위치한 오베른드르프(Oberndorf)란 작은 마을 성니콜라스 교회에 시무하는 모올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간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오르간은 잘차흐강의 습기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에 놓고 갑자기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수리를 위한 기술자의 방문은 봄이나 돼야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때 성탄절 행사도 해야 하고, 연극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한 대밖에 없는 오르간이 고장이 났으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시골 마을이라 기술자는 봄이나 오게 되어있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형편도 안되었기 때문에 모올 신부는 벌써 며칠째 오르간을 뜯어서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르간도 없이 어떻게 성탄절 행사를 할까?” 몹시 상심한 모올 신부는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 꿇어앉은 채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환한 달빛이 비치는 마을의 풍경이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구나!” 그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감동받은 순간, 모올 신부는 아름다운 시 한 편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비대면(un contact)과 사회적 거리두기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는 말한다. 세계대전 후에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팬데믹 (pandemic) 후에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미국 전염병 연구소 파우치 소장은 2021년 말에는 종식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지금 우리는 변종 바아러스로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빌게이츠는 2022년에나 종식될 수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일상의 복귀가 아니다. 언제든지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팬데믹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백신은 유효기간이 3~4 개월이다. 코로나는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어주셔야만 끝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비(非)인간화와 기계화로 결국에는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되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며 인간의 무한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죽고 죽이는 정글 구조를 만들고 있다. 지구화·도시
코로나19 사태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 목회는 대면 중심의 현장 예배를 지향하던 한국교 회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초연결사회, 접속 패러다임의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예배당의 빈자리에 성도를 채우는 것이 부흥이라고 배워온 목회자들로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텅 빈예배당에서 새로운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가상공간 혹은 사적인 공간의 공적 공간화”이다. 다시 말해 예배와 신앙교육의 공간이 교회당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니 급진적으로 가상의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 누가 주일 예배를 자기 집 거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드리는 성도들의 믿음이 선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미 세상은 코로나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의 변화에 직면하여, 누구나 손쉽게 스마트폰 안에 디지털 공간과 접속해 가장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예배가 가능한 초연결사회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코로나19 사태는 4차 산업 시대의 변화를 실험하는 도전과 모험의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감염병 전문가뿐 아니라 사회의 패러다임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코로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변화를 요구했다. 너무나 안일했던 초기 대응과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어리석음이 화를 키웠다고도 말한다. 또한 교회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코로나를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일명 지혜롭게 하라는 말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믿음뿐이다. 언제든 조건은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이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이 정의처럼 주장하고 동조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린 단순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신정 민주주의자이다. 조건과 상황에 적응하여 변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비대면 신앙은 없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전투다. 싸우는 것이다. 져도 괜챦은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소개하는 글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하면 특별히 코로나 이전의 교회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다. 주일이면 예배드리고, 주중엔 수요예배, 구역 예배, 금요예배로, 매일
코로나19는 팬데믹이다. 11월 7일 현재 240개 국가에서 확진자 수 약 2억 5000만명, 사망자 수약 530만명으로 전 세계 인구 79억명 중 3.2%가 코로나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전염병과 인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 인간은 미생물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을 대책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창과 말라리아는 고대 로마를 멸망시켰으며 장티푸스와 세균성 이질, 괴혈병은 십자군 원정을 실패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은 페스트는 중세를 몰락시켰고, 두창은 이후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사라지게 했다. 전쟁광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것은 발진티푸스였으며, 오늘날의 미국 영토를 완성 시킨 것도 황열이었다. 20세기 초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세배가 넘는 5000만명의 목숨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대책 없이 전염병에게 당하고만 있던 인간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백신과 항생제를 발견했고 두창과 페스트를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더불어 위생의 중요성도 부각되어 도시 계획, 공공보건 정책, 법적 환경 개선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손씻기의 생활화와 식생활의 개선 그리고 일회용 주
병거 3만, 마병 6000, 군사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블레셋에 고작 600명의 병력으로 맞선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석류나무 아래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으로 믿었고, “여 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다.”고 확신하며(6절) 소년 병사 하나와 단 둘이 블레셋 진영으로 침입 한다. 큰 바위로 둘러쳐진 요새라 난공 불락(難攻不落)으로 보였지만 믿음으로 들어가 싸운다. 거룩한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먼저 어느 나라를 침략하며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아니다. 너무 약했기 때문에 누구를 공격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전쟁이 방어 전쟁, 이스라엘은 그때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에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 제사부터 드린 거룩한 전쟁이었다. 제사장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개입을 기원한 것이다. 또 이 전쟁은 법궤가 동원된 거룩한 전쟁이었다(18절). 사울 왕이 법궤 동원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전쟁은 금식하며 치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자는 사람과 이단은 아니라고 보는 자로 양분되어 있다. 이단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통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단 그룹에 끼어 넣기를 꺼리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누가 선뜻 그게 이단이요라고 말하기에는 대단한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본인은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강력히 외친다. 그런데 안식교를 정통으로 보는 사람은 그들의 부활 신앙과 현세 삶의 도덕성과 정결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단됨의 정체를 모호하게 말하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교의 지옥관리, 죽음교리 때문에 이단으로 본다. 안식교는 지옥이 없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없다. 죽음은 단치 부활 때까지 수면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생명의 중단기간이다. 안식교의 사관(死觀)은 인간 사후 무의 식의 흙으로의 복귀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모두 구약이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146:4)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됨이니라”(전9:5)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