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1782년10월 27일~1840년5월 27일)를 설명할 때 수식어처럼 붙는 말입니다. 파가니니는 어떻게 이런 극단의 수식어를 갖게 되었을까요? ‘뮤지컬 파가니니’는 대전예술의전당과 HG컬쳐가 공동으로 기획한 것으로 2018년 12월 21~25일까지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에서 초연한 작품입니다. 저는 그 작품의 연습실부터 리허설, 본 공연까지 사진으로 기록하며 배우들과 공연 전 함께 기도하며 가장 가까이서 작품을 지켜봤습니다. 작품 중 당시 교회권력(성당)이 파가니니에 대한 세상의 소문에 대한 부담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교회는 왜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파가니니는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지만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시인 하이네의 ‘파가니니의 발에 사슬이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는 말로 인해 악마의 연주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1840년 5월 27일, 니콜로 파가가니가 숨을 거둔 후 그의 아들 아킬레가 아버지를 제노바의 교회에 매장하려 하지만 주교가 그에 대한 평판으로
가슴 가득 큰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한해를 시작했지만 희망은 희미해지고 팍팍한 현실 앞에서 무거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달이 2월이라고 한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따스한 봄날을 기다리는 길목인 듯한 2월이지만 한파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고도 한다. 그만큼 환경도, 경제도 답답하고 삶 자체가 움츠러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섭리와 주권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되뇌게 된다. 우리는 평안하고 안락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고 힘든 상황이 오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있는가, 혹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지난날 경험한 은혜는 까맣게 잊고 그저 낙담하고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 상황을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이 또한 은혜이며 축복의 통로임을 발견하게 된다. 어려움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고, 고난을 헤쳐 가는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말씀을 현실적으로 체험
2019년 새해를 시작하고 이제는 날짜를 기입하는 것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새해라고 하기 조금 어색한 시기가 됐나보다. 그래도 1월 한 달간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설렘과 기대감을 갖는 것이 올해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1월 한 달 만이라도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각,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각오를 다짐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일까? 1월이 오면 특별히 많아지는 행사가 신년음악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음악회들이다. 그래서 해마다 신년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을 살펴보면 그 연주회가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신년음악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이 바로 스트라우스의 월츠곡들이다. 아름다운 선율과 우아하고 고상한 왈츠 리듬이 주는 편안한 경쾌함이 새해의 기운과 닮아 있어서인 듯해서인지 지난 반세기 동안 각 연주단체들이 즐겨 연주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빈 왈츠의 전통과 대중화를 만들어낸 스트라우스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와 아들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이다. 이 두 부자는 대를 이어 비엔나 왈츠의 부활과 부흥을
클래식 음악 문헌 가운데에는 특정 계절을 위한 음악들이 간혹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인형이 대표적인 예이고 헨델의 메시아 또한 성탄시즌에 집중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들을 작곡한 작곡가들은 딱히 성탄음악이라고 특정 짓거나 계절을 크게 의식하고 이 작품들은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연주자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이 작품들의 연주시기를 성탄시즌에 집중한 것이 유례가 되어 크리스마스 때에 연주되는 음악들로 제한해 두었다. 그러나 작곡가 자신이 계절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음악들도 다수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비발디의 사계이다. 관현악 모음곡 형식의 음악들이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세 악장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음악들은 계절을 시작할 때마다 자주 연주되고 또 방송 매체에서도 계절을 알리는 공식적인 음악으로 자주 전파를 타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비발디의 “가을”은 이 짧고 아쉬운 계절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음악이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빨간 머리 사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였지만 사역보다는
(1)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해 앞선 글에서 필자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것에, 그리고 예배도 시대와 관계없이 기획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과연 기획이 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의 이유는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정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예배철학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필자는 그 중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어떤 만남이든 소중하지 않은 만남은 없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필자도 아내와의 결혼 전 교제하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아내의 반응이 달랐던 것을 기억한다. 이 밖에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준비할 때, 우리는 그 만남을 잘 준비해야한다. 그 만남이 지나가는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깊어지길 원한다면, 만날수록 더욱 지루하고 진부한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새로워지길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기대한다면 말이다. 예배는 이와 비교할
주일 오후에 스코틀랜드 출신 헨리 라이트(Henry Lyte) 목사는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영국 브릭스햄의 바닷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산책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산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질환을 앓던 라이트 목사는 갯바람을 쐬면 건강이 회복될까 해서 30세였을 때, 이곳으로 옮겨와 작은 교회를 맡았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그가 영국을 떠나 따뜻한 이탈리아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라이트 목사는 그날 오전 주일예배에서 자신과 20년 넘게 함께해온 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식을 행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들릴 듯 말 듯 힘이 없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죽음을 맡기고 우리가 맞게 될 엄숙한 시간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설교를 마쳤을 때 모두가 진한 감동을 받았다. 예배가 끝나고 그는 20여 년간 걸어온 친숙한 바닷가에서 마지막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탈리아에 가면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삶과 죽음 그 어디
‘예배’와 ‘기획’이라는 단어는 어찌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기획’은 뭔가 인간적인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세상도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또다른 표현으로는 기획)속에 만들어졌으며, 성경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닐까? 조금 돌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주 지키는 교회력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된 좋은 기획 프로그램이 아닐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드렸던 ‘회당’ 예배와 ‘성막’예배에서도 예배에 대한 정해진 순서와 내용이 있었다. 모든 것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에는 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지금의 ‘큐시트’라는 형태가 없었을 뿐, 당시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따른 예배 순서에 그에 관련된 준비가 있었다. 지금도 그 어떤 교회이든 ‘주보’를 보면 예배의 순서와 예배 시작시간이 있다. 그리고 각 순서에 따른 직관적, 또는 암묵적으로라도 할당된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만찬을 할 때면 집례자와 분잔, 분병에 따른 위치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이며 분잔과 분병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순리가 참 고마운 여름의 끝자락이다. 이제는 제법 가을을 예감할 수 있는 바람과 함께 그렇게 치열했던 여름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다.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을 찾아보다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의 피아노 음악을 다시 만났다. 27세의 청년 슈만이 음악으로 표현한 삶의 환상과 현실에 대한 진술이 담긴 환상소곡집 작품 12번은 피아노 소리를 아름다운 시적 서정으로 표현한 8곡의 주옥같은 소품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슈만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를, 그녀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비크씨의 극심한 반대로 서로를 보지 못하는 시기에 작곡된 음악으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몽상적인 이상주의자와 다소 냉소적이지만 열정을 가진 작곡가의 양면적 내면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음악은 슈만의 음악적 미학이 농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각 곡에 제목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낭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세 번
덥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더운 여름철은 무엇이든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 삼복더위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더운 요즘에는 입음새와 먹거리는 물론이고 잠시 서있을 때에도 시원한 그늘만을 찾게 된다. 기온과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도 높아지는 여름철에는 신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많이 지치게 된다. 몸은 처지고 마음은 무겁고 조금만 움직여도 더위에 지치는 여름을 잘 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도 삶에서 꼭 필요한 지혜일 것 같다. 덥다고 해서 일상을 멈출 수도 없고, 또 무조건 시원한 곳만 찾아다닐 수도, 차가운 것들만 곁에 둘 수도 없는 여름에는 무엇보다 매사에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평정과 균형을 위한 음악을 생각하다가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의 핑갈의 동굴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됐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에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추위를 느낄 정도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기에 제목부터가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한 이 음악은 멘델스존의 여행의 결과물 중에 하나이다. 독일 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명성이 있었던 멘델스
아담 가이벨(Adam Geibel)은 어릴 적 눈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그에겐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신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달콤한 신혼의 꿈을 펼칠 즈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위가 다니는 제철회사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여러 명이 죽었고 사망자 명단에 사위의 이름이 들어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가이벨은 딸과 함께 사고 현장에 가서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사고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딸이, 또 사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겨왔던가. 어찌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눈도 모자라 딸의 사랑까지 앗아간단 말인가.” 가이벨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가이벨은 절친한 친구인 찬송작가 찰스 마일즈(Charles Miles)를 찾아갔다.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가족에게까지 이런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