맴맴맴! 해마다 여름철이 올 때마다 아름다운 매매소리의 합창이 옛날 시골의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작대기로 나뭇가지를 쳐서 또는 친구들의 어깨 위에 서서 나무에 붙은 매미를 한 깡통씩 잡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 작은 매미가 어떻게 저렇게 고운 소리를 내어 울려 퍼질까? 저 아무렇게나 소리지르는 듯한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았다. 저 소리를 몇 일간 내기 위해 몇 년을 어두운 땅 속에서 지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우리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여러 가지 식물의 조직 속이나 나뭇가지에 산란된 매미의 알은 2~6주간에 부화되어 깨어 나온 매미의 애벌레(유충)는 땅 속으로 들어가 침과 같이 생긴 뾰족한 주둥이로 나무뿌리를 찔러 그 속의 수액(樹液)을 빨아 먹으면서 몇 해를 자란다. 다 자란 ‘굼벵이’ 성충은 초여름부터 나타나는데, 맑은 날을 골라 대체로 저녁 해질 무렵 땅 위로 기어 나와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등에 몸을 고정시킨 매미로 탈피를 한다. 애벌레가 땅속에서 보내는 기간은 종별로 달라서 2~7년을 땅 속에서 보내는 것부터 2~7년에서 13~17년을 보내는 것 등 다양하다. 이 현상은 천적을 따돌리기 위해 채택된 하나의 생존
얼마 전 있었던 우리 교회 전교인체육대회. 그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계주 경기였는데, 담임목사도 무조건 뛰어야 한다 해서 무심코 뛰었다가 아주 혼쭐만 났던 이야기를 잠깐 하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날 오후, 아직 밝은 대낮에 별을 다 봤다. 하늘의 별이 아닌 내 눈앞의 별.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참 유난히도 야속하게 그 별은 반짝반짝 빛났다. 게다가 하얀 분이라도 바른 듯 얼굴마저 하얘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한동안 말할 힘마저도 없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숨만 가쁘게 몰아쉬었다. 담임목사가 흰 팬티 걸쳐 입고 온 성도들 앞에서 내달리는 수모(?)는 차라리 괜찮다. 나로 인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니까. 그 창피 줄여주려 일부러 더 큰 함성으로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함성과 함께 박수로 응원해주신 성도들이 있으니 그거야 괜찮다. 문제는 그 200미터가 내겐 죽을 것 같은 고통이어서 그렇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반 바퀴씩만 뛰게 하더니 마지막 주자인 내게만 한 바퀴를 뛰게 하다니, 아무튼 이 주최 측 농간(?)에 담임목사만 혼났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함께 뛴 다른 목사도 체력의 한계로 스텝이 꼬여 그만 마지막 순
이 연구의 목적은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주목하며 노인인구 증가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통해 목회적 대처 방안을 연구함으로 다가올 미래목회를 준비하는데 있다. 이 논문이 품고 있는 핵심 질문은 한국교회가 고령화의 시대적 흐름에 대비해 목회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를 위해 논문 서두에는 교회에서 고령화로 인해 야기되고 있는 문제점을 제기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며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거칠 것이다. 다음에는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인식과 가치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을 통해 노인목회의 중요성과 필요에 대한 인식과 효과적인 목회방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논문의 결론에서는 고령화 시대를 대비한 교회의 긍정적적이고 효과적인 목회 방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한국교회 현장에 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목회적 방안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현실 UN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로 14% 이상이면 고령사회(aged society)로 20% 이상 시에는 초고령 사회(post-ag
“교회는 가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제도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평신도신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송인규는 ‘신분’과 ‘직분’이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은 평등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범주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도나 장로 등의 ‘일꾼’으로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행 15:23; 엡 3:7~8). 이것을 어떤 신학자들은 역할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다뤘다. 예컨대, 스캇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한 백성’ 안에 ‘구별’은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3. 사역 주체로서의 평신도 평신도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평신도로 하여금 본연의 위치를 찾고 자신의 책임을 잘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 신학자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논하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즉 평신도가 교회의 사명 성취를 위한 사역의 주체라는 것이고, 그 사역은 ‘세
부산의 박 목사님의 부친이 소천했기에 여러 목회자 부부가 장례 예식장으로 조문을 갔다. 위로 예배를 드린 후에 박 목사님이 집안 소개를 하는 순서에서 참여했던 모두가 박수를 쳐줬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해주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행위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했었다. 우리가 왜 박수쳤는가를 다시금 생각해본다면 첫째,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78명이었는데 모두 예수님을 믿고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한다고 했다. 어떤 여 집사님은 자기 혼자만 예수님을 믿고 성인된 자녀들이 6명 되지만 1명도 예수님 믿지 않는다고 통곡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이런 가정들이 얼마나 많을까? 박 목사님의 부친의 경우엔 자녀들, 며느리들,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주일 예배를 드리는 가족들이라고 하니 박수 쳐 줄 일이었다. 둘째는 박 목사님의 형제가 5명인데 그 중에 맏형은 장로교회에서 목회했고, 그와 동생은 침례교단에서 목회했다. 다른 2형제는 장로와 안수집사로 각각 섬기는 교회는 달랐지만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다. 또 그의 조카 중
얼마 전 근처 교회에서 권사 임직을 하며 순서를 맡게 됐다. 다시 권사에 대해서, 나아가 교회 직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권사(勸師, exhorter)란 “교회에서 전도와 봉사 그리고 권면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권사 임직을 생각하니 오래 전 들었던 말이 떠 올라 눈물을 훔쳤다. 어느 교회에 연세도 있으시고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께서 계셨다.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칭찬 듣는 권사님이셨다. 어느 토요일, 권사님이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여자 하나가 부엌에서 나오는데 무엇인가 숨기듯 감추며 인사도 못하고 황급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갔다. 그런데 주일 준비하러 왔던 사람들이 주일에 쓰려고 사다 놓은 고기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다 기도하고 간 권사님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권사님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도하러 교회에 갈 때 황급히 나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말을 하려다가 만약 말을 하면 그 여자를 찾아갈 것이고 교회에 소문이 나면 교회에 못 다닐 거란 생각에 “내가 그랬노라고 고기를 보니 먹고 싶어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교회로 집회를 오셨을 때 이리저리 여행이 많아 시차 때문에 피곤하시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면 밤낮이 바뀌는 시차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주 꼬박 고생한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시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무 때나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신단다. 아침까지 억지로 자야겠다는 생각이 없으시니, 잠이 안 오는 밤이나 새벽이 고역스럽지 않으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문득 갱년기를 그다지 힘들지 않게 잘 지나가셨다는 한 집사님 생각도 난다. 그분에게도 갱년기의 흔한 증상인 불면증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자다 깨지면 그냥 일어나서 이 일 저 일 보다가 잠이 오면 자고, 안 오면 그냥 일어나 일을 가신단다. 그럼 다음 날은 어찌 되었건 푹 주무신다나…. 이 정도로 긍정적이면 불면증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찌 됐건 다음 날은 잘 테니까. 그러다 또 잠이 안 오면 다른 일 하면 되니까…. 사람들이 상담을 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증상을 없애는 데에 있다. 다들 골칫거리를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하다. 화가 치미는 현상을 없애고, 불면증을 없애고, 우울감과 불안감을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중략).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으므로 삼등이나 그 이하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중략). 등’은 순위나 등급 또는 경쟁을 나타내고, ‘류’는 위치나 부류의 질적 가치를 나타낸다(중략). 결국 삼류란 질의 문제로 ‘질이 형편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공산품일 경우 품질의 문제이고, 인간일 경우 인격과 인품의 문제이고, 국가일 경우 국격의 문제다.” 정호승 저(著) ‘정호승의 새벽편지’(해냄, 120-12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일등이 꼭 일류는 아닙니다. 일등이지만 삼류 같은 사람이 있고, 삼등이라도 일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삼등 완행열차에 일류 낭만을 실을 수 있고, 일등 고속전철에 삼류 추태를 실을 수도 있습니다. 삼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삼등을 축복하십니다. 꼴찌에게도 박수와 갈채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삼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꼭 일등 같아 보이지만 삼류 인생을 산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늘 상석에 앉으며 일등이 되려 했고, 일등처럼 보였지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빌2:16) 전도사 시절 미국에서 살 때 부모님이 집을 한 채 사주신 적이있습니다. 그곳에서 파를 심어 키워 먹을 생각으로 모종을 20개 정도 구입해서 마당 한구석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이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지 도저히 삽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 또다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하는 식으로 반복하면서 파들어 가 끝내는 모종을 다 심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매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올 때마다 그곳에 들러서 물을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 녀석들이 땅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나올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먹고 말지”하는 마음으로 포기한 뒤로는 관심조차 마음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무심코 그 주위를 거닐던 저는 대변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들의 생명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삽질조차하기 어렵던 그 돌덩어리 같던 땅들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
4. 우리나라의 평신도신학 현황 WCC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평신도신학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개신교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평신도 훈련으로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던 옥한흠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역을 담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평신도에 관한 한국교계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1986년에는 총신대학부설 한국교회문제연구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1992년에는 옥한흠 외 7인에 의한 소책자 “평신도”가 출간됐으며, 1997년에는 심일섭의 “평신도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가 나왔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착화 운동을 평신도신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듬해에 출간된 김점옥의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라”는 주로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리더의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평신도 분야의 발전 과정은 느리게 진행됐고, 체계적인 신학의 정립보다는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한 평신도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은 당시 평신도교회 운동을 실천하던 최승호가 1998
어느 엿장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엿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튀는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술사를 찾아갔습니다. 모진 훈련 끝에 갖가지 마술을 전수받았습니다. 모든 과정을 마친 날, 마술사 스승은 제자 엿장수를 앉혀 놓고 결정적인 마지막 훈수를 해줬습니다. “네가 즐겁지 않으면 보는 사람도 즐겁지 않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타오르지 않는 한, 남을 타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영혼을 싣지 않는 일에 이웃은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거울은 먼저 웃어 주질 않습니다. 내가 먼저 웃어야 합니다. 산소 마스크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 속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산소 마스크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먼저 어른이 착용하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이나 노약자의 차례라고 합니다. 어린이나 노약자를 먼저 돌보는 것이 예절이고 상식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이 먼저 건강해야 약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먼저 맛봐야 합니다. 가장 감동적인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이 먼저 감동 속에서 시를 써야 가능합니다. 가장 능력 있는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말씀을 받은 확신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냉랭하면서도 남
1980년 초 한국의 몇몇 캠퍼스에서 소수의 대학원 기독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삶과 괴리된 신앙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복음주의 기독교세계관 스터디 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카이스트 등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였고, 또 하나는 인문, 사회” 계통의 대학원생이 주축이 된 “기독교학문연구회”였다. 각자의 모임은 큰 틀에서 문제의식과 목적을 공유하고 간간히 교류하며 발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라는 이름 아래 통합됐다. 현재 약 6000명의 회원이 소속된 국내 가장 큰 기독교 NGO기관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 겨자씨보다도 작아 보였던 모임, 그 당시 첫 기도를 심고 뿌렸던, 학생들 대다수는 현재 여러 대학 캠퍼스의 시니어 교수들과 각계 최고 전문가들로 성장했다. 이 단체는 현재 매년 두 차례 대규모 기독교세계관 학술대회와 네 차례의 등재학술지 (신앙과 학문) 발간, 그리고 지속적으로 여러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 수많은 자원을 파송해 섬기고 있다. 기독교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요즘, 우리가 이 땅의 청년 세대를 향하여 무엇으로 다시 복음의 농사를 지을 것인가? 어제도 밤늦게
크래머(Kraemer)는 이런 역사적 변질이 성경적 교회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교회사의 경향”이 ‘제도적인 교회’ 쪽으로 더 치우쳐 흘러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힘의 압력” 즉 사회적 및 정치적 압력과 교회 안팎의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하고 효과적인 지도력과 권위가 요청됐던” 상황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성서적인 형태에 가까이 가기보다는 교리와 권위의 단체로 발전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2. 종교개혁으로 인한 회복의 시작 12세기 이후에는 여러 종파가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도전과 반발을 거세게 했다. 14세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저항 운동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에 근거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 했던 이 운동들은 마침내 16세기에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평신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은준관은 이에 대해,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적 평신도 지상주의라는 양극단의 틈바구니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교회론과 만인제사장 사
침례신문의 ‘하늘 붓 가는 대로’ 103회에 다음과 같은 표제의 나의 에세이가 게재됐다. ‘며느리와 딸’. ‘나도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아들 권순태 목사 집에 두 달을 머문 적이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환상적인 커플로서 뭇 교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이민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저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의 존재였다. 며느리는 친할 듯 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말할 듯 하면서 침묵하기를 꼬박 두 달 동안 그러했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 정도를 넘어서 나는 며느리를 경계했다. 어떻든 며느리에게 결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달 체류 중 며느리에게 불평하거나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 노부부는 최대한 노력했다. 끼니 때는 사인 주기 전에 식탁에 앉았다. 밥 먹고는 언제나 잘 먹었다고 말했다. 두 달 동안 이런 시아버지의 “Thank You”에 “you’re welcome”이란 말을 며느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나는 점심은 외식으로 때웠다. 식사 시간에도 며느리와 함께 한 적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10분 이상을 마주 앉아 담소한 적이 없었다. 어딜 가든 담소 잘 하기로 꽤나 유명
1960년 2월 저동교회 임암천 목사가 나에게 “강성찬 전도사를 부흥강사로 초청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청빙해라”고 전했다. 그래서 나는 경북 산골 고령까지 먼 길을 찾아갔다. 농촌교회를 개척한 총각 강 전도사는 마침 자체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집사 내외를 불러서 “멀리서 한 선생이 손님으로 오셨는데 방이 이렇게 차가워서 되갔소, 군불을 잘 넣고 또 반찬도 계란 같은 것이나 생선도 밥상에 오르게 하이소”라고 힘있게 일러줬다. 식사 대접을 잘 받은 후 저녁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따뜻한 방에서 잘 자고 나서 이튿날 나는 강성찬 전도사를 저동교회 부흥강사로 초청하기로 허락받고 모교회 임암천 목사에게 통지했다. 세월이 흘러 강성찬 전도사는 목사가 됐고 부산교회를 부임해 강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해 간증을 듣게 됐다. 그는 평안도 정주의 농부의 아들이었고 선친은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었다. 마침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농토는 공산당에게 빼앗겼고, 그때는 소 두 마리가 전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 중 송아지를 기쁜 마음으로 건축헌물로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연자맷돌을 돌리던 건장한 어미소가 갑자기 혀를 길게 내밀고 침을 흘리며 눈동자가 흐려지고 비